[마태복음 24:45-51ㅣ김남수 목사]
오늘날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세대를 3 가지로 규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첫째가 충격시대입니다.
우리는 늘 충격을 많이 받습니다. 충격이 면역이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깜짝 놀랄만한 일들을 계속 당합니다. 역사상 처음이자 몇 백 년 만에 있는 일이다 하는 일들을 당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거스르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홍수다 지지이다 재난이다 전쟁이다 학살이다 …. 지금 우리가 멀리 있어서 잘 모르지마는 인도에서는 너무 날이 더워서 2000 여명이나 죽었다고 합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더위에 지쳐서 수천 명이나 죽어갔습니다…. 그런가 하면 큰 도시 몇 개가 그대로 땅 속에 꺼져 들어가 몇 만 명이다 없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충격적입니다.
둘째는 비이성시대라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자기가 쓴 책의제목을「이성으로부터 도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요새 사람들 많이 압니다. 다 알면서도 아는 대로 살지 않습니다. 옛 사람들은 몰라서 그랬지만, 요새 사람들은 알고도 뻔 한 길을 갑니다. 이를테면, 담배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도 담배 피우고, 술에 빠지면 필경 패가망신한다는 것 알면서도, 술에 빠집니다. 하는 것들이 다 알면서 합니다. 이성의 지시와 이성의 가르치는 것을 거슬려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 삽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알기도 하고 말도 잘 합니다. 그런데 실천하지를 않습니다. 합리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이성의 지시에 따라, 논리적으로 바르게 살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르게 살도록 우리에게 밝은 이성을 주셨는데, 이 밝은 이성마저 흐리게 만듭니다. 그것이 술 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박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마약입니다. 이런 일이 다 비이성시대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불신시대라는 것입니다.
참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못 믿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오늘의 우리 현실이 부도 시대 아닙니까? 신용이 부도났습니다. 수표가 부도났습니다. 경제가 부도났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불신시대입니다.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특별히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안정이 있고, 무슨 평화가 있겠습니까? 무슨 능력이 있고, 무슨 축복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현실입니다. 지식이다, 경험이다, 자본이다, 노력이다, 하는 것은 옛날 얘기 입니다. 이것들이 성공의 비결이 아닙니다. 오늘 당한 우리의 문제는 신뢰성입니다. 믿을 수 없는 사회가 되었으니까, 어디서부터라도 다시 시작을 해서 믿는 사회가 되어야 경제가 산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프란시스 흐꾸야마 라고 하는 분이 쓴「Trust」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신뢰라고 하는 것은 아주 근본적인 경제적 가치라는 것입니다. 경제 가치, 그 기본이 신뢰요, 또 이것이 사회 자본이라는 것입니다. 무형 자본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 신뢰라고 하는 자본이요, 밑천입니다. 신뢰라고 하는 밑천이 끊어지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돈 떨어져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밑천 떨어지면 끝나는데, 그것이 바로 신뢰라는 말입니다. 믿을 수 없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학자의 말을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나, 이 책에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이 책은 신뢰를 문화적인 산물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신뢰성을 문화배경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 문화에 따라서, 문화 구조에 따라서, 신뢰의 정도가 가늠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실상 신뢰의 문제는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이는 그 어느 때에라도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에 믿음을 말한다면, 신뢰는 그 수단입니다. 수단으로서의 신뢰라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산주의가 왜 무너졌습니까? 동구를 가보면 자, 그 좋은 문화적 배경, 그 예술, 그 광활한 대지, 자본으로부터 기술로부터 원자탄에, 잠수함에 …. 못 가진 것이 있겠습니까? 다 가졌습니다. 넘치게 가졌는데 망했습니다. 왜입니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KGB가 무엇입니까? 불신의 소산입니다. 목 믿으니까, 숙청을 하는 것입니다. 매년 백만 명을 숙청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도 안 되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사람을 세워놓고, 총살을 해도 신뢰성을 그것 가지고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에게 명령을 하고, 그 뒤에 감시자를 세우고, 또 그 뒤에 감시자를 세우고 …. 아무리 감시해 보아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신뢰성이 무너지므로 사회가, 나라가, 경제가,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결론입니다. 여러분, 내가 남을 믿을 수가 없을 때, 불안에 떱니다. 저가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내 모든 능력은 소실됩니다. 아무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할 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나를 믿어준다 할 때 에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믿어주지 않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사이에 무기력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강한 문제를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멀리 가면서 그 종들을 집에 두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인이 없는 동안에, 그 종들 가운데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로운 자 -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른바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대체로 남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에 노처녀가 많습니다. 왜요? 못 믿으니까요? 어느 만자를 믿어! - 그러니 늙어 마땅하지요. 안 믿습니다. 안 믿는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병입니다. 구제 불능의 병입니다. 안 믿는 병입니다. 누구도 못 믿겠다고 합니다. 똑똑하지요. 그래 믿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 봅니다마는, 인생이 다 가도 믿을 사람 없습니다. 내가 나를 못 믿는데 누구를 믿습니까? 바로 이것, 의심은 병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롭다’ 하는 말과, ‘충성 되다’ 는 말을 하나의 뜻으로 연결하는데, 진리가 있습니다. 충성됨은 곧 지혜입니다. 충성된 자, 진실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정직하고 충성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부터 내려오는, 원죄적인 성격이 있는 죄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나무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단이 말합니다. 열매를 따 먹어도 안 죽는다고, 그래서 의심이 듭니다. 여기서 망조가 든 것이 아닙니까? 결국은 우리 마음속에 의심이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이 병입니다. 지혜 있는 체하나 그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불신은 어리석음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 충성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보여 줍니다.
먼저는 ‘주인이 없을 때’ 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멀리 가고 없습니다. 언제 올는지도 모릅니다. 요새같이 전화가 오는 것도 아닙니다. 팩스가 오는 것도 아닙니다. 주인은 멀리 갔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충성된 것입니다. 주인의 감시가 있을 때건 없을 때건, 주인이 보든 안보든, 충성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정직이요, 진실입니다. 정직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진실’ 하면 조건을 묻지 않습니다. 내 진실은 내가 지킬 따름입니다.
어느 잡지에서 본 얘기입니다. ex) 미국사람들은 넓은 벌판으로 차를 타고 가다가 사거리에 있는 신호등에 빨간불이 딱 나오면, 보는 사람이 있건 없건 무조건 차를 멈추고, 파란 등이 켜지면 갑니다. 그런데, 구소련에서 살던 사람 가운데,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미국에 와서 사는 동안에 차를 타고 가다가 빨간 등이 켜지면, 일단은 멈추고 휘휘 돌아보는데 아무도 안 보이면, 파란 신호가 아직 안 나왔는데도, 그냥 지나가 버린다고 합니다. 통계를 내보니, 100사람이면 100사람 다 이렀더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 치하에서 길들여진, 타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모르고 있음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적당 적당히 살아야 됩니다. 거짓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게 체질이 된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여러분, 밖에 나가서 이제 신호등 앞에 딱 서 보십시오. 아직도 파란 신호등 나오기 전에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 보면 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일찍 죽을게다, 저렇게 서두르니까 신호 바뀔 때까지 서 있으면, 뒤에서 빵빵거립니다. 빨리 가라고, 이게 우리의 수준입니다. 이게 우리의 신뢰성 수준입니다. 우리의 진실의 정도입니다. 남이 보건 안 보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딱지를 떼이고 안 떼이고 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나대로 진실할 것입니다. 왜? 내 양심이요, 자존심이니까.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지, 수단이 아닙니다. 누가 보고 안 보고,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 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저속한 짓들을 많이 하니까, 마음이 졸아 들어서 비겁한 인간들이 되는 것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살 것입니다. 왜, 너만 그렇게 알고, 나만 알아야 되는 일이 많습니까? 왜, 이렇게 숨겨야 될 일이 많은 것입니까? 왜 그렇게 비밀이 많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주인이 있든 없든, 나는 주인의 종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내 진실과 충성은 내가 다 할 뿐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정직함은, 하나님 앞에 있을 뿐 사람의 눈치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직의 기본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이 정직함의 보상이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축복이 오는 것입니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정직할 따름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써전트 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미국에 노예제도가 있을 때인데, 어느 날 노예 시장을 지나가다 보니, 예쁘게 생긴 소년이 지금 악한 사람에게 붙들려 와서 지금 팔려가려는 참입니다. 지금 경매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다, 얼마다 하여, 사람을 상품으로 하여, 저마다 떠들 고들 있습니다. 써전트 목사님은 그 광경을 보고 측은해졌습니다. ‘이 소년이 거짓말을 많이 하고, 못되게 놀아 서 주인이 데리고 와서 팔려고 하는가 보다’ 생각을 하고 소년에게 다가가 넌지시 물어 보았습니다. “얘야, 내가 너를 사줄까? 내가 저 악한 주인으로부터 너를 사준다면, 앞으로는 네가 정직하게 삶겠느냐?” 그랬더니 그 소년아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입니다.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저씨가 나를 사 주든 말든, 나는 나대로 정직할 것입니다.” 이 말에 목사님이 몹시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자유로워지든 자유롭지 못하든, 주인이 악하든 선하든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나로서 정직할 뿐입니다. 충성될 뿐입니다. 이것이 충성의 기본입니다.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 조건도 없고, 보상 바라는 마음 없이 정직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내가 정직하면 무엇이 주어지나,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나, 잘 되나 못 되나, -왜 그것을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정직 자체가 너무나 크고 중요한 데 말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람의 진실은 생산적인 것이었습니다. 능률적이고, 경영학적이었습니다. 스스로 정직하고 충성되게 일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양식을 주고, 함께 일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파급효과를 낸 것입니다. 내가 정직할 때 다른 사람도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다 부정직하면, 나도 흔들리기 슆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착한 사람은 스스로 정직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 일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양식을 주고 일을 시켰습니다. 자신도 하고 남도 하고. - 이것이 진실함입니다. 그뿐 아니라, 나아가 이 사람은 아주 부지런했습니다. 특별히 주인이 언제 오느냐에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악한 사람들은 주인 올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 해서 술 먹고, 방탕하고, 치고받고….이렇게 삶았거든요. 그러나 착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언제 오느냐 상관이 없습니다. 아침에 오면 어떻고, 저녁에 오면 어떻습니까? 안 오면 어떻습니까? 나는 나대로 진실할 뿐입니다. 이것이 충성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학교에서 보아서도 그렇습니다. 공부 잘 하는 학생은 시험에 마음을 안 씁니다. 그저 묵묵하게 공부합니다. 그런데 시원치 않는 학생은 꼭 물어봅니다. “시험 언제 보나요?” 또 하나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시험 문제가 어떻게 나오나요?” 합니다. 이런 것에 눈치작전을 펴고 마음을 파는 것, 이것은 기회주의이거든요. 이런 것 신경 안 쓰고 살 수 없습니까? 남이 보든 안 보든, 듣든 안 듣든, 보상이야 있건 없건,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건, 내가 언제 죽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충성할 뿐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우리는 정직함마저 사업적이 됐습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이제 기본적으로 돌아가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충성됨과 정직함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잃어버린 신뢰성을 회복해야 되겠습니다. 문제는 신뢰성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자신을 믿고 있습니까? 얼마나 아내를 믿을 수 있고, 남편을 믿을 수 있습니까? 얼마나 자식을 믿습니까? 믿음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저는 이런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아들에게 한 학기 공부할 돈을 주었는데, 이 아이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이거 가지고 포커를 하느냐고 돈을 다 없앴습니다. 하숙집에서도 쫓겨나, 공원의 벤치에서 밤을 새우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이는 벌벌 떨면서 울다 웃다 했지마는, 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돈 2만 불을 주었습니다. “이거 일 년 공부할 돈이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다 말렸습니다. 그 아이는 돈 관리할 능력이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조금 씩 조금 씩 주도록 하자고 충고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내 아들을 믿습니다. 언제라도 돈은 제 자신이 관리해야 한다.” 하고 그 큰돈을 아들에게 주어 버립니다. 그 후 이 아들은 그 아버지에게 얼마나 감사를 했는지. 다시는 부모로부터 돈을 지원받지 않고, 고학해서 공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믿어야 됩니다, 믿어 주어야 됩니다. 언제까지 의심할 것입니까? 의심하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고(高)신뢰 사회, 고(高)신뢰성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문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 거기에 신뢰가 있는 것입니다. Colgate‘(콜게이트)’ 라고 하는 치약이 있습니다. 콜게이트 라고 하는 사람이 17살 때 뉴욕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배 안에서 점잖게 생긴 노인을 만났습니다. 노인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가나?” “뉴욕 갑니다.” “왜 가나?” “성공해 보려고 갑니다.” “무얼 할 건대?”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성공할 것입니다.” “자네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삼촌댁에서 비누 만드는 공장에서 심부름을 좀 했습니다.” “그러면 비누 만들면 되겠구먼.” “아, 그 기회를 주시면 제가 만들지요.” “그러면 값을 생각하지 말고, 성공과 출세도 생각하지 말고 가장 정직하고 가장 좋은 비누를 만들게,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꼭 십일조를 바치게나.” 이 말을 마음에 새긴 그는 뉴욕에 들어가서, 비누와 치약을 만들기 시작했고, 오늘 우리가 쓰는 콜게이트 치약회사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신용이 자본입니다. 신용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이것만 가지면,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나아갑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도 읽을수록 감동이 됩니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말씀 겸허히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