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9:1-6ㅣ김남수 목사]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기를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는 절대 필요한 것이 3 가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인간 존재로 존재하기 위해서 3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가 ‘중요성’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미가 있고, 삶의 뜻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뜻, 다시 말하면 자기 존재의 의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자기 존재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산다느니, 보람을 먹고 산다느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삽니다. 받아야만 삽니다. 그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가 동생이 태어나면, 여기서 사랑을 빼앗기게 될 때, 아이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병이 난다거나, 이상 성격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주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주가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말이야 하는 못하든, 내가 지금 받고 있던 사랑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무조건 사랑을 받아야 살고, 그 다음에는 사랑을 하면서 삽니다. 사랑을 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독신자와 결혼한 여자를 봅시다. 누가 더 오래 살 것 같습니까? 누가 건강할 것 같습니까? 아, 우리 생각에야 아이들한테 시달리지 않고, 남편에게도 시달리지 않고, 오직 자유롭게 자기 마음대로 훨훨 산 여자가 더 오래 살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통계학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독신 여자가 병이 많고 단명합니다. 가톨릭 수녀의 평균 수명이 40세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밉건 곱건, 미워할 사람이 있든 사랑할 사람이 있든, 뭐가 하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고, 사랑 받으며 살고, 여기서 삶의 보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웅겔스마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To know self it to be known by another’ 자기가 자기를 안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알려진 바에 의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오실 때도, 하다 못해 한 번이라도 거울을 보고 얼굴에 뭘 바르고 오셨습니다. 그건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요새 남자들도 향수를 많이 씁니다. 저는 향수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싫어하거든요. 아무튼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알게 모르게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돈 버는 것도 그런 차원입니다. 공부 하는 것도 자기 존재의 차원을 높이자는 데 동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significance입니다. 그것은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니 내 값은 얼마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을 실만큼의 값입니다. 지불된 대가에 내 삶의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알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need of security'입니다.
‘안정성’ 을 필요로 합니다. 의식주 분야의 안정도 중요하지마는 그것은 동물적 차원의 욕구이고, 정신적으로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모두가 평안한 마음을 원합니다. 그래서 화목을 찾아 헤맵니다. 화목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원수 맺고 살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뼈가 썩습니다. 병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때에라도 마음을 완전히 풀고 화평의 사람이 되어야, 'peace-maker' 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남을 죽이려다가 자기가 먼저 죽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이래서 평안을 위하고 샬롬, 평안 속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추구합니다.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need of belongings'입니다.
소속 관리입니다. 소속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끈끈한 정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연대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친구와 더불어, 직장과 더불어, 나라와 더불어, 민족과 더불어.…. 이렇게 서로 소속되고, 서로 끈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독은 죄입니다. 절대로 고독할 수 없습니다. 고독을 느끼는 순간, 그 존재는 벌써 떨어지고 있습니다. 타락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다. 가정을 느끼고, 넓은 사랑을 느끼고 있을 때 그 존재가, 인간의 존재가 건강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시기, 질투, 증오, 그것은 결코 사람을 사람 되게 하지 못합니다. 사랑과 평화-사랑하고 사랑받는 거기서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건강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름지기 이런 존재, 이런 사람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져야 합니다. 여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430년이란 햇수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430세나 나이 먹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노예 중에 태어난 것입니다. 수십 대에 걸쳐서 노예로 태어나고, 노예로 성장하고, 노예로 살아왔을 뿐입니다. 노예생활이 그들에게는 숫제 체질화한 것입니다. 속속들이 체질화하였습니다. 문화화해 버렸습니다. 이같이 불쌍한 사람들을 주께서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그 자체가, 큰 기적으로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시내 광야에 데려다 놓으신 다음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훈련시키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시키는 말씀 중에서 그 총체적인 말씀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구해냈느니라, 너희는 애굽에서 지금 여기에 왔느니라. 나와 너희와의 관계는 이러하다.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 독수리 날개라고 하는 상징적 용어로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계십니다. 신 32:11에 보면, 모세가 40년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며 지도자로 살고, 나이 많아 세상을 떠나게 될 때, 40년의 생을 돌아보면서도, 그는 똑같은 말씀을 합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를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신 32:11, 12), - 보십시오. 바로 이것입니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보호하셨다.- 이렇게 한 마다 말씀합니다.
거기 깊은 뜻이 있습니다. 독수리는 새 중에 왕입니다. 힘과 위엄의 상징이요, 자유와 용맹의 상징입니다. 높이 날아서 하루 종일일도, 날개를 펴고 기류를 타고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실로 장관입니다. 천하무적 입니다. 그에게 당할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독수리입니다. 그 기상을 많은 사람이 부러워해서, 독수리를 자기의 표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독수리는 지구상에 48종이 있다고 합니다. 독수리는 둥지를 틀 때도 누가 침해할 수 있는데 자리를 잡지 않고 깊은 산, 높은 벽, 바위 위, 벼랑 위에다 둥지를 트는데, 직경이 무려 2.7 - 3m나 되는 큰 둥지입니다. 그 둥지를 털어보면, 둥지 하나의 무게가 무려 2톤이나 나가는 게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큰 둥지를 만든 다음에 그 속에서 삽니다. 새끼를 낳고 말입니다. 그가 먹이를 향해서, 먹이를 채려고 쏜살같이 내려갈 때에는 시속 180km의 속력이라고 합니다. 그러가 하면, 그는 한 번 날 때마다 직경 90km를 반경으로 해서 멀리 날아다니면서 먹이를 구하고, 배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독수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독수리와 새끼의 문제입니다. 그가 그 둥지에서 새끼를 낳아 이걸 깨워 가지고 큰 다음에 어느 정도 먹이를 주어 날 때 쯤 되면 말입니다. 새끼를 그 벼랑에서 떨어뜨립니다. 발로 밀어서 떨어 드리면, 새끼가 그 높은데서 떨어지면서 죽는다고 퍼덕거립니다. 아, 나 떨어져 죽는다고 원망도 하겠지요. 아이쿠, 너무 가혹하다, 나를 어쩌라고 때려 밀고 죽이려드나 하겠지요마는 그렇게 푸덕거리고 있을 때, 땅에 닿기 직전에, 멀리서 지켜보다가 휙 내려온 어미가 낚아채어 올라갑니다. 그렇게 새끼를 둥지에 도로 갖다 놓았다가 조금 쉬어가지고 또 밀어 떨어뜨립니다. 하루 종일, 며칠 동안 이 짓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독수리로 하여금, 그 새끼로 하여금 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날개를 강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사는 게 독수리다, 독수리로 태어났다고 독수리가 아니라 하고, 훈련을 시켜서 건강한 위상의 독수리를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됩니다. 그에게, 새끼에게 고통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 가지고 안 됩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말만 가지고 안 됩니다. 모범을 보이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날마다 ‘나를 따르며 날아라’ 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벼랑에서 떨어뜨립니다. 직접 몸으로 경험하도록, 사건에 부딪히도록.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대학이 얼마나 많습니까? 경제학이다, 정치학이다, 도덕이다, 뭐라,…. 그 많은 날 배우고 가르친다고 했지만,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이제 와서 딱 부딪히고 나니까, 겨우 조금 정신을 차리는 것 같습니다. 말로는 안 됩니다. 도덕 강연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독수리가 그 새끼를 벼랑에서 떨어뜨리듯 말입니다. 이젠 죽었다. 이젠 끝났다. 할 만큼 되더라 그 말입니다. 그러나 어미 독수리는 멀리서 지켜봅니다. 푸덕 푸덕 날면서 떨어지는 것을 다 지켜봅니다. 어느 정도의 힘이 있는지, 어느 정도의 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켜보다가, 땅에 부딪히기 직전에 내려와 새끼를 등에 업고 올라갑니다. 절대 버려두지 않습니다. 보호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며 보호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행동으로 직접 역사해서 보호합니다. 그리고 독수리의 수준까지 필요한 모든 능력을 그에게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가져야 할 지혜, 독수리가 가져야 할 능력, 그 강함. 이것을 철저하게 훈련시켜 나가더란 말입니다.
카프만 부인의「광야의 샘」이라고 하는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아주 주의 깊게 고치에게 번데기가 변하여 나비가 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보노라니 고치에 바늘 구멍만한 게 뚫립니다. 보셨는지 모르지만 시골에서는 아주 자주 볼 수 있는데, 바늘 구멍만한 동그란 구멍이 뚫리고, 거기서 나비가 나옵니다.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되어 나올 때, 좌우간 하루 종일 걸립니다. 몇 시간 걸려서 조금씩 조금씩 나오면서 고생을 합니다. 날개 죽지가 하나 나오고 버둥거리다가, 또 한 쪽이 나오고 버둥거리다가, 또 안 나와서 버둥거리고 ….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루 종일 그것을 해 가지고 겨우 나옵니다. 나와 가지고 몇 바퀴 돌다가 푸덕거리며 날아올라 갑니다. 이걸 보셨습니다. 이걸 지켜보다가 ‘아, 저리도 고생스럽게 나오는구나, 쯧 쯧.’ 그래서 가위로 구멍을 좀 크게 뚫어 주었습니다. 뚫어 주니까 그 나비가 쉽게 쑥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나오는 걸 보면서 카프만 부인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 보다 더 사랑이 많다. 내가 더 자비가 크다. 저 고생하지 않도록 내가 나오게 해 주었으니, 내가 참 훌륭하다. 하고, 혼자서 빙그레 웃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켜보았더니, 보십시오. 그렇게 꺼내 놓은 나비는 끝내 날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실비실 뺑뺑이를 치다가는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편하게 해 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오히려 나비를 죽인 결과가 된 것입니다. 그녀는 왜 그럴까 하고, 연구를 해보았습니다. 나비가 작은 구멍으로 나오면서 몸부림칠 때에,
그 몸에 있던 영양이 날개로 건너갑니다. 영양가가 날개로 건너가면서 날개가 힘을 얻습니다. 그 좁은 구멍으로 나오느라고 몸부림을 치면서 온 몸이 운동을 해서 힘을 얻어 가지고, 그렇게 나와야 날아갈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리석은 짓 상상적으로 해 가지고, 나비만 죽였구나.’ 하고 그녀는 회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에게는 가혹하다 할 만큼, 깜짝 놀랄 만큼, 아이고. 이제는 죽는다할 만큼 어려운 일들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일환입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교과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훈련 과정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가르치십니다. 이것을 통하여 훈련하십니다. 강인하게 하십니다.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평안한 가운데서는 이런 사람 이런 인격이 절대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민족, 대단한 민족이지요. 이 강한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조그만 민족 500만 밖에 안 되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노벨상 받은 사람 가운데 60%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할 말 있습니까? 오늘도 우리에게 경제 문제가 있지마는 세계적으로 경제를 흔드는 자들이 유대인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이토록 강한 연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남보다 특별히 고생을 많이 했지 않습니까? 참, 이스라엘 민족이야 말로 지독하게 고생입니다. 뭐 지금도 그게 뭐 사는 것입니까? 언제 총소리가 날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고난 속에서 강한 민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기적이라는 것이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기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안일한 생활을 하도록, 기적은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에 위대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방법이 아니고, 당신의 방법입니다. 'my way' 가 아닙니다. ‘His Way’ 입니다. 거기에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고,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마음을 뜨겁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명령을 따르면,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제사장의 나라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간에 있는 존재입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가르치고, 백성을 치유하는 사람입니다. 엄격히 말하여 다른 사람 다 타락해도 이 제사장들만 하나님께 곧게 서면, 그 나라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사장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보면, 제사장 직분의 레위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많은 역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리라. 너희를 먼저 선택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통하여 만백성을 다스릴 것이니라. 너희의 섬김을 받을 것이니라, 너희는 대표적 백성이 될 것임이니라. 치유자로 내가 너희를 쓸 것이니라.“
독립 운동의 귀한 선구자로 많이 수고하신 신앙인 도산 안창호 장로님이 임종하게 될 때, 목사님이 옆에 서서 기도하고, 그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목사님의 손을 꽉 잡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나지막하게 들릴 가 말 가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더랍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
“하---” 다음에 무슨 말씀을 하실 참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꼭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교과과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새 독수리 같은 우리가 이제는 우리의 방법을 다 포기하고, 누구도 원망하지 맙시다. 그리고 그의 길, 그의 섭리, 그의 지혜, 그의 인도하심에 그대로 의지합시다. 사랑하며 순종하고, 감사하므로 순종합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이 원하시는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