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7-12ㅣ김남수 목사]
「교회 밖에서 만나는 재미있는 교회이야기」라고 하는 긴 이름의 책이 있습니다. 요새 보면 스캔들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마는, 1,500년 그 때에, 더욱이 종교개혁자의 스캔들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흥미가 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1525년 6월 13일에 가톨릭 수녀 출신의 카타리나 본 보라와 화촉을 밝혔습니다. 당시로서는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결혼입니다마는 500년 전 그 당시로 돌아가 보면, 교회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당시의 교회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용납할 수 없는 스캔들임에 틀림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가톨릭 수녀와 가톨릭 수도사가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 있다가 뛰쳐나온 사람과 수녀원에서 한 평생 살다가 거기서 죽어갈 사람이 탈출해 나와 결혼을 한 것임으로 이야말로 세계적인 스캔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톨릭 개념으로 볼 때는 수도사와 수녀의 결혼이란 명백한 간음에 속한 일입니다. 해서 마르틴 루터는 타락한 성직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을 하고 있는 동료들로 부터도 비난을 받았습니다. 왜 이와 같은 때에 결혼을 하는가? 왜 이와 같은 때에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여 결혼을 함으로써, 교회를 어지럽히느냐 하는 비난이 들끓었습니다. 종교개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일이 큰데, 안 해도 될 결혼을 왜 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고들 비난했습니다.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이 사건은 아주 골치 아픈 사건이었습니다. 스캔들이 아닐 수 없는, 유감스러운 사건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같은 사람은 아주 빈정대는 투, 글까지 썼습니다. ‘장엄한 비극으로 등장한 종교개혁이 코미디로 막을 내렸다’ - 이렇게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면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복을 따르는 이상, 사람들이 나를 두고 뭐라고 말하는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여기시느냐 아니냐. 그것만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루터는 그 모든 비난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럴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당하게 떳떳하게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혼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1520년 초반부터 마르티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특별히 루터 자신이 수도원에 있다가 뛰쳐나온 사람이기 때문에,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에게 종교개혁사상이 깊이 파급되었습니다. 많은 수도사들이 수도원에서 뛰쳐나왔습니다. 또 가톨릭 수녀들도 수도원을 탈출해 나왔습니다. 9명의 수녀가 나왔는데, 이 사람들은 자생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수도원에만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나와서는 생계를 꾸릴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부득불 저들에게 직장을 얻어 주기도 하고, 또 서로 서로 짝을 맞추어 결혼을 시켰습니다. 수도사들과 수녀들과 ……. 이런 일들은 다해서 루터만을 쳐다보고 수도원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을 책임져야 했던 것입니다. 9명 중 8명의 수녀가 이렇게 저렇게 결혼을 했는데,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바로 카타리나였습니다. 아무도 이 여자와는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란 얼굴에 툭 튀어 나온 이마, 볼품없이 길쭉한 코, 불쑥 튀어 나온 광대뼈, ……. 아주 고집스럽게 생긴, 시세말로 못생긴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아서 이 여자는, 카타리나는 시집을 못 가게 되었는데, 마르틴 루터는 그러면 내가 데리고 살지 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카타리나와 이렇게 결혼을 한 것인데, 사람들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비난만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역사적으로 유명하게 현명한 부인이었습니다. 빼어난 지성의 사람이요, 화목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하게 루터를 내조해서 성공하도록 일조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이 엄청난 일 앞에서 사방으로부터 루터를 죽이려들었습니다. 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가운데서 살아갔기 때문에, 그는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밤에 잠을 잘 들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귀야, 나 좀 자게 내 버려 주어라, 내가 죄를 많이 지은 죄인이라는 것은 네가 꼬드기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니, 이제 그만 좀 해라” 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일을 놓고, 밀고 나가노라니, 자신의 죄가 자꾸 생각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죄, - 마귀가 계속 공격을 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다.’ 하고 이렇듯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의 에피소드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밖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 카타리나가 상복을 입고 울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누가 죽었소? 왜 울고 있는 거요?” 했더니 아내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셔서 상복을 입고 웁니다.” 루터는 펄쩍 뜁니다. “하나님께서 돌아가시다니, 그 무슨 불경스런 소리요” 카타리나는 조용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어째서 당신이 낙심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면서 왜 피곤해 합니까?” 루터는 아차 하고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용기를 얻었고, 마침내 종교개혁을 완성했다는 얘기입니다. 카타리나가 이렇듯 공이 큰 것입니다
여러분,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득의의 교리를 들고 ‘오직 믿음으로’ 라는 그 신앙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밀고 나갔습니다. 그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신학화 했습니다. 성경적 진리에 의해서 설명하고, 철학적 진리에 의해서 변증했습니다. 루터 나름의 종교 개혁적 개혁신학을 이루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믿는 대로 살았습니다. 믿음을 생활화 하였습니다. 신앙의 가장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주관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신앙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믿음을, 스스로 자기가 자기생각을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병 나을 줄 믿습니다. 복 받을 줄 믿습니다. 아들 나을 줄 믿습니다. 주여 …….’ 이러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까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내 마음대로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김치 국부터 먼저 마신다고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주관적 신앙, 주관화, 참 무서운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잘못된 것이 바로 믿음의 추상화입니다. 지식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깨닫고, 많이 기억하면 이것이 믿음인줄 압니다. 그리고 어쩌다 성경 진리에 한 번 감격하면, 이것이 무슨 믿음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식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절대로 신앙이 아닙니다. 지식일 따름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한번은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갔는데, 때 마침 그 교회에서 성경말씀 암송대회를 합니다. 성경 잘 외는 사람을 심사해서, 개 중에서 잘 외는 몇 사람을 데려다 놓고 성경을 외우게 하는데 참 놀랍습니다. 좌우간 빌립보서를 외는데, 그 넉 장을 한숨도 안 쉬고 외는 것입니다. 눈 찔끔 감고 쫙 ……. 내가 심사를 하는데 안 틀립니다. 1등이 결정되었습니다. 상을 주는데, 온 교인이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습니다. 2등한 사람에게는 박수를 칩니다. 3등한 사람에게도 박수를 칩니다. 1등에게만 박수를 안치는 것입니다. 이것 참 이상하구나 싶었는데, 나중에 하는 말을 들어 본 즉 그 사람이 성경을 잘 외지만 시어머니하고 싸우는 데는 아주 용감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악부라고 합니다. 남편에게나 아이들에게나 할 것 없이 사납고 막되 먹었는데, 성경은 잘 외는 것이었습니다. 이러 사람,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성경 66권을 다 외면 뭐가 어떻다는 것입니까? 이런 것이 믿음인 줄 알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추상적 믿음입니다. 문제는 신앙이 생활화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히 11장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믿음장입니다. 첫 절부터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이것이 믿음이라 합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실제 사건 속에서, 생활 속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 믿음의 사람들의 살아 간 모습을 여기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소위 ‘case study’ 입니다. 슈프링거 라는 학자는 사람들의 가치관, 혹은 그들의 기본 철학에는 6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형입니다. 만사에 돈만 생각합니다. 타산적입니다. 또 이론형입니다. 자기 논리에 맞아야만 받아들이고 하는 사람, 지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미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런 감상에 젖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형입니다. 꼭 남을 지배해야만 성에 찹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형입니다.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사귀고, 친구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종교형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잠자리에 들 때도 할렐루야입니다. 하나님 언제나 하나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이 종교형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을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학화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입은 그 놀라운 진리 안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의를 수용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하나의 비유를 통해 자상하게 일러 주셨습니다. 한평생 생각해도, 그 속에 무궁무진한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명백히 불효자입니다.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한 가닥 믿음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버지는 기뻐합니다. ‘돈 얼마나 남겼느냐?’ 라고 묻지도 않고, ‘그러기에 집을 나가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하고 과거를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하고 너무도 좋아서 잔치를 엽니다. 아들은 말합니다. ‘나는 아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없으니 머슴으로나 대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베풉니다. 만일 이때 이 아들이 ‘이러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면 제가 더 비참해집니다.’ 라고 말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나왔다면 그는 율법주의자입니다. ‘정 이렇게 대하시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니 집을 나가고 말겠습니다.’ 했다면, 그 사람은 영영 구제불능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면 무자격합니다.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이 그러하니 나는 아들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이다’ 하시니 내 아들인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는 것이면, 내가 사랑받는 아들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좀 염치가 없는 법입니다. 염치가 없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시는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기에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랑으로 덮으시어 ‘너는 내 아들이다, 나는 너를 위하여 이 같은 십자가를 지노라’ 하실 때,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종교 개혁적 신앙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제 더는 율법에 매일 필요도 없고, 과거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 안에, 그 사랑 안에 살아가는 것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구체적인 역사적인 예를 듭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 – 보십시오. 노아는 어떠했습니까? 온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다 멸망당합니다. 노아도 신통치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120년 후에 홍수로 멸망하리라 하실 때, 이 말씀은 꼭 노아만이 들어야 하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메시지를 받으면, 120년 후에 망한다는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노아와 같이 방주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도 산꼭대기에다. 바닷가에다 짓는 것이 아니고 산위에다 120년이나 걸쳐서 그 많은 날, 많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요. ‘정신 나간 할아버지’라는 소리도 들었겠지요. ‘미친 짓’ 이라는 말도 들었겠지요. 그러니 노아 그 만은 저 120년 후에 있을 홍수를 생각하면서 방주를 예비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오늘 나의 생활을 지배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느 목사님 딸 하나를 압니다. 그 목사님에게 5남매의 자녀가 있습니다. 아들 2, 딸 3 입니다. 목사님의 평생소원이 ‘아들 중에서 하나라도 좋으니 목사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소원이기도 합니다. 잘 크고 대학 마치고 좋은 아들들, 제발 이 중에서 하나라도 내 뒤를 이어 목사가 되어 주었으면 했는데, 어느 아들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딸들도 다 제멋대로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막내딸이 아버지의 그 간절한 소원을 알고, ‘나는 목사는 못 되어도, 목사 아내는 되어야 하겠다하고, 대학 1학년 때부터 각 교회를 돌아다나면서 주보를 다 모으는가 하면,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연구하고, 목회를 연구하고, 또 설교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일일이 스크랩해서 모아놓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눈여겨 본 바입니다. 침 신통합니다. 꾸준히 이렇게 하더니, 대학 졸업반 때 농촌봉사 갔다가 배필 목사를 만나 결혼했더라고요. 지금도 서울 안에 있는 목사 사모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장차 목사 사모가 되겠다고 생각했으면, 그것이 그 믿음이라면 오늘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는가 하는 교훈이 여기에 있어서입니다. 노아가 보여주는 믿음이 그런 믿음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을 떠나라 하십니다. 이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는 떠납니다. 그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공간적 시간적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듭니다. 그 땅을 지키지 못하고, 애굽으로 피난을 갑니다.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한 10년 기다려 보고, 아내도 단산하고, 이렇게 저렇게 되니까, ‘내가 하나님 말씀을 잘 못 들었던가?’ 했던지 첩을 얻어 턱 아들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왜 휘청거리느냐 하고 책망하십니다.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제 25년 후에(아내는 단산한 지 오래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년에 아들을 주마하십니다. 25년 전에 들었던 말씀입니다. 오랜 세월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에서 그는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 믿음을 똑바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면, 자책이 많았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자격이 없습니다. 무자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여 말씀하십니까, 하고 받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롭다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자식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약속을 믿으매 네 부족한 것을 허물을 그 약속 안에서 다 소화해버립니다. 오직 약속만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또 오늘 말씀에 강조되는 것은 사라에 관한 것입니다. 사라는 죽은 자와 방불한 여자입니다. 나이 90세입니다. 단산한 지도 까마득히 오래됐습니다. 그러나 내년에 아들을 주마하실 때, 다시 용기를 냅니다. 저는 이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리적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이 90세 된 할머니를 언제 보았는지 모릅니다. 별방한 지 오래됐습니다. 거들떠보지도 않은지 오래됐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저 노파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십니다. 이 엄청난 말씀을 믿고 그는 다시 아내와 합방을 합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 입니다. 여기서 이삭을 얻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것을 부활의 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다 죽은 것과 같습니다. 생리적으로는 다 끝난 사람인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용기를 냅니다. 그리하여 약속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 자신의 약점과 인간적으로 부족한 모든 면을 믿음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선 위대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이란 세속화된 믿음을 재정비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복음 진리, 그 진수가 무엇이냐 하고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입니다. 복음에 대한 재해석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란 믿음을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화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실제의 구체적 생활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이요, 순교사의 마음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이 엄청난 축복을 더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