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8-10ㅣ김남수 목사]
여러분 혹 무슨 물건을 사는데, 내가 잡지에서 보았든지 소문을 들었든지 해서 꼭 필요한 것을 만났다고 합시다. ‘이건 참 귀한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찾았는데 어디에 이런 것이 있을까?’ 그리고 연락을 하고 상점을 찾아갔습니다. 가령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삽니다. 이건 몇 년 동안 내가 기다렸던 거니까요. 값을 따질 것도 없지요. 그대로 돈을 주고 사 가지고 나올 때에, 이 귀한 물건을 손에 넣는 여러분은 한없이 좋습니다. 이건 정말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런가하면 이것을 판 장사하는 사람도 이렇게 가격을 따지지 않고 사 가는 자는 흥정하자고 들지도 않은 값을 깎자고 도 안하고, 그대로 좋은 마음으로 고맙습니다 하고 가져가는 사람을 볼 때, 썩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win win입니다. 양쪽이 다 좋은 것이거든요.
제가 언젠가 한 번 타임지를 보다가 시계 하나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한국 시간과 미국시간을 둘 다 알 수 있는 시계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지금 낮인지 밤인지 그것도 말해 줍니다. 각 나라에 갈 때마다 번거롭게 시간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한 번씩 조금씩 손만 누르면 되게 돼 있습니다. 그런 시계가 나왔다 하는 광고가 나온 것입니다. 제가 이걸 수첩에 써 가지고 가서, 백화점마다 가면서 물었습니다. 그런 게 없습니다. 잡지에 난 광고는 보았지만, 아직 물건을 못 봤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새로 나온 물건인가 봐요. 백화점에 가서 얘기를 했더니, 거기서는 이런 물건 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거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 구해 올 수는 있는데 구해오면 가격을 묻지 마셔야 됩니다. 목사님께서는 반드시 이걸 사셔야 합니다. 이 특수한 기회에 안사시면 우리는 낭패 봅니다.” 알았다고, 가져 오라고, 참 기가 막히게 만든 특별한 시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경우에,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둘 다 기분 좋은 것입니다. 이 세상만사가 다 이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로 win win의 사회구조였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생명의 면류관”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어로 'crown' 이라고 합니다마는 이 생명의 면류관이란 말은 헬라어에서는 단어가 완전히 둘로 다릅니다. 하나는 ‘다이데마’ 라고 하는 말인데 이는 'sign of royalty'입니다. 왕권, 권력의 상징입니다. 왕이 쓴 면류관을 가리켜 ‘crown’ 이라고 합니다. ‘다이데마’입니다.
또 하나는 ‘스테파노스’입니다. 바로 이 말에서 스테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테파노스’란 하나의 'prize of victory'입니다. 승리에 대한 표상으로, 상으로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스테파노스’ 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오랫동안 훈련하고, 인내하고, 철저한 그 절정에서 평가 받은 면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면류관으로 상징되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이 경기에 나가서 잠간 뜁니다. 불과 한 시간, 두 시간, 혹 어떤 종목은 3분, 1분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습니까? 많은 훈련을 하고, 인내하고, 참고, 젊은 사람들이면서 절제하고, 한 많은 수고 끝에 얻은 그 절정에서 그에게 씌어주는 영광의 상징, 이것이 면류관입니다. ‘스테파노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새 와서 학자들이 쓰는 용어 가운데 새로운 용어가 많습니다. 그 하나가 ‘소프트 파워’ 라고 하는 말입니다. 아주 유명한 유행어입니다. ‘소프트’ 라고 하면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부드럽고, 조용하고, 관대하고, 온화한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런 파워, 그런 힘이 ‘소프트 파워’ 입니다. 권력이되 부드러운 권력입니다. 부드러운 권력 - 이거 특별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가 이깁니다. 성경에도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강한 자가 패하고, 오히려 부드러운 자, 온유한 자, 화평한 자가 이기는 거기에 놀라운 역사적 의미도 있고, 심판적 의미도 있고, 성서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새는 ‘소프트 밸류’, ‘하드 밸류’ 라는 말을 합니다. 가치를 말하는 것인데, 유형적 가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물질이라든가, 기술이라든가, 지식이라든가, 설비라든가, 자본이라든가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유형적 가치가 있는가 하면, 무형적 가치가 있습니다. 이미지라든가 혹은 장사하는 상업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말하자면 고객 만족도라든가 하는 것이고, 또 일하는 사람들의 경우 얼마나 기쁨으로 일하는가, 얼마나 보람과 의미를 느끼며 일하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을 무형적 가치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을 ‘소프트 밸류’ 라고 합니다. 그러면 ‘소프트 파워 라는 건 뭔가 하면, 소프트 밸류를 창출하는 정신적 에너지, 내지 창의적 아이디어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누가 이깁니까? 물력입니까? 권력입니까? 체력입니까? 심력입니까? 지력입니까?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승리의 80%가 심력입니다. 마음의 힘입니다. 그리고 20%가 체력입니다. 또는 지력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체력마저도 심력에서 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다 무너지고 맙니다.
여러분 이것을 얼마나 날마다 새롭게 느끼고 있습니까? 얼마나 확실하게 체험하고 있습니까? 건강이 밥으로 됩니까? 운동으로 됩니까? 보약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80%가 마음입니다. 예수를 잘 믿어야 됩니다.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마음에 은혜가 없으면 보약은 독약이 됩니다. 보아하니 보약, 중독증으로도 죽더라고요. 운동하다가도 고꾸라집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결국은 심력입니다. 마음의 힘입니다. 또 다른 말로 말하면 영력입니다. 영적인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운동경기를 봅니다마는 그 운동 경기 속에서도 가만히 보면 심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심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성공하려면 3M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M 자로 시작하는 석자. Mission, Meaning, Money의 3가지가 균형적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Mission’ 사명이 있어야 되고, 사명의식이 투철해야 됩니다. ‘Meaning’ 의미가 있어야 됩니다. 보람과 의미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Money’ 경제적인 문제도 함께 따라가야 한다하는 것입니다. 사명은 목적이다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목적이 높아야 합니다. 언제나 동기를 묻습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느냐, 그 동기가 얼마나 고상하냐. 이게 문제입니다. 동기가 낮은 처지에 있고, 너절하고 형편없는 그것에 목적이 있다면 그 인간은 비참합니다. 모든 일 전체가 다 망가집니다. 높은 목적, 고상한 목적, 절대적인 높은 목적을 행해야 어떤 일을 하든지 힘이 있고, 용기가 있고, 또 지혜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의식 ‘Mission’입니다.
그 다음에는 보람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도 부엌에서 일하면서 혹은 집안 이을 하면서도 보람을 느꼈습니까? 아니면 내 어쩌다 똑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산단 말인가. 짜증스럽게 생각했습니까? 순간순간 우리는 하는 일의 의미를 아주 충만한 의미를 만끽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바로 그것이 힘입니다. 성공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여건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말 가운데 또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오토텔릭’ 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오토’ 라고 하는 것은 헬라말로 ‘아우토스’입니다. 'myself'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헬라말로 ‘텔로스’ 라는 말은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를 합쳐서 ‘아우토텔레스’ 인데 이것을 영어로는 'autotelic' 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자기 목적성입니다. 자신의 목적이 되고 현재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주의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오토텔릭’ 이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런 자기 목적성을 가질 때, 창의력도 있고, 자율성도 있고, 행복성도 있고, 지혜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무슨 사업을 하든지, 예를 들어 공부를 한다고 합시다. 공부 자체가 즐거워야 됩니다. 공부하는 게 재미있고, 책 읽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 이런 재미가 있어야 되는데, 이 공부가 ‘오토텔릭’ 이 되지가 못하고, 바뀌면 이거 해야 돈 벌지 하고 억지로 해야 됩니다. 공부 안하면 죽는다. 공부 안하면 못산다 ― 자 이렇게 되면 참 힘든 일이 됩니다.
결혼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결혼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 벌려고 하는 것입니까? 늘그막에 신세 좀 지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다 목적이 어디론가 가 버렸다고요. 자기 목적성을 잃어버리면 무엇이든지 타락한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승리가 뭡니까? 바로 목적성에 있는 것입니다. 목적성, 그런 상태를 다른 말로 충성이라고 합니다. 충성 ‘피스티스’ 라는 이 말은 우선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faithfulness. 믿음입니다. 믿음. 내가 나를 믿고, 내가 남을 믿고, 남이 나를 믿어야 됩니다. 신용도가 높아야 됩니다. trustfulness.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가하면 내가 지향한 목적 그 높은 목적에 대한 그러한데 대한 ‘충성’ 입니다. 내가 세운 목적에 대하여, 신실한 목적에 대해여 충성, 얼마나 충성했느냐, 그것에 따라서 내 생이 좌우됩니다. 목적에 합당한 생을 산 것은 성공이요, 거기서 이탈한 것은 어떤 일이든지 실패와 부끄러움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목적의 의미, 그리고 거기에 내 전체를 쏟는 것, Totally Commitment. 온 정력을 다 기울이며 동시에 그 기울인 일을 즐기는 것입니다. 일을 해서 무얼 하느냐가 아니고, 일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섬길 때 섬기는 그 일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말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고. 그렇습니다.
분명히 주는 것인데 3가지가 있습니다.
++주어서 무얼 얻고자 하는 대가성의 주는 것, 무엇을 바라고 주는 것이 있고,
++또 한 가지는, 줄 수밖에 없어서 주는 것입니다.
빼앗기는 것입니다. 강도 만나는 것입니다. 안 줄 수 없어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조적으로 주는 것 Creating Giving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는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베푸는 것이 좋습니다. 그 자체가 너무도 행복한 것입니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 서머나 교회는 계시록의 7교회 중 책망을 받지 아니한 가장 훌륭한 교회입니다. 서머나 라고 하는 도시는 당시에 에베소 다음으로 큰 도시요, 지금도 인구 20만의 도시입니다. 지금도 인구 1/3이 그리스도인입니다. 2000여 년 동안 신앙을 이어오는 거룩한 도시, 아주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교회를 향하여 주신 메시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주후 2C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충성을 이야기 할 때 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이 유대인들의 모함을 받아서 로마 총독이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형에 처하기 위해서 장작더미를 쌓아 놓고 거기에 폴리갑을 세워놓고 마지막으로 질문을 합니다. 총독이 볼 때는 86세나 되는 나이 많고 존경받는 어른을 화형에 처한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괴로워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합니다. “지금이라도 가이샤 황제를 찬양하고 그리스도를 욕하시오. 한 번만 그리하시오. 그리하면 내가 그대를 놓아줄 터이니 조용히 다른 곳에 가서 여생을 사시오.” 그러나 폴리갑은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겨 왔는데, 주님께서는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주님을 내 어찌 배신할 수 있겠소? 주님 위해 사는 것이 주님 위해 죽는 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영광이라오.” 그리고는 화형에 처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충성입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충성했고, 죽을지언정 충성했고, 사는 것보다 충성을 더 높은 가치로 생각했습니다. 다 얻었더라도 충성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진실을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직함을 잃어버리면 낭패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죽고 사는 것보다 진실함은 그 위에 있고, 충성은 그 위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에 대한 책도 많고, 소설도 많습니다마는, 언젠가 한번 그 이야기를 다룬 참 훌륭한 연극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다 올려놓으려고 할 때 27살의 그 아들을 강제로 묶어 올릴 수도 없지 않습니까? 안한다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내가 너 사랑하는 것을 네가 아느냐?” “압니다.” “얼마나 아느냐?” “당신 목숨보다 나를 더 사랑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됐어.”
또 하나 묻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네가 믿느냐? 변함없는 약속, 반드시 이루시는 그 은혜의 약속을 네가 믿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올라가거라.” 이삭은 두 손을 내어 놓고 아버지 보고 묶으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밧줄로 묶고 그 아들을 제단 위에 뉘인 다음에 칼로 찌르려고 하는 그 장면, 연극으로 하는 것이지만 가슴이 뜨겁고,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입니까?
이런 충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네가 아느냐? 이런 충성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네가 아느냐? 참 사랑을 알면 충성은 아주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까? 영원한 약속을 믿습니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하는 약속을 믿습니까? 이것만 믿을 수 있다면 충성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약속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 맺는다고 말씀합니다. 충성은 모든 것보다 위에 있습니다. 살고 죽고, 손해 보고, 부끄럽다고, 승리하고……. 이런 것이 문제가 안 됩니다. 충성과 진실이 그 모든 것보다 우선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리라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