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54-60ㅣ김남수 목사]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하루는 깊은 명상과 함께 주님을 생각하고 교제를 나누며 기도하는 중에, 환상 중 천국 문을 들어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국 문을 지키고 있던 베드로 사도가 그를 맞이합니다. 웨슬리 선생은 천국에 들어가지를 않고 문간에서 베드로 사도에게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감리교를 위하여 전심전력을 했는데, 지기가 전도하고 자기와 같이 하던 사람들 가운데서 이미 죽은 사람이 많거든요.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서 이렇게 물어 보았다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한 영광스러운 메소디스트 감리교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천국에 얼마나 들어왔는지, 그것이 좀 궁금합니다.” 베드로는 한 명부를 한참 뒤적거리고 나서, 한 말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웨슬리 선생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 그렇다면 나의 신앙은 잘못된 모양이군요. 그러면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영광스러운 칼빈의 5대 교리를 강조하는 장로교 사람들은 몇 사람이나 들어왔습니까? 하고 웨슬리가 다시 물었더니, 베드로는 한참 살펴보고 나서, 그 역시 ‘없다’ 고 합니다. 웨슬리는 더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 그는 겸손히 생각했습니다. “아 아무래도 우리 종교개혁운동은 대단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 거군요.” 한 가지 더 물읍시다. 그러면 천주교인은 얼마나 들어왔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그 역시 ‘없다’ 고 대답합니다. 웨슬리 선생은 더욱 더 놀라서 “그러면 도대체 누가 이 천국에 들어오는 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빙그레 웃고, 요한 웨슬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나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 그리고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오는 곳이죠. 감리교인이나 장로교인이나 천주교인이다가 문제 아니죠. 누구든 예수 믿으면 그리고 성령 충만하면 이 천국에 들어오는 것이죠.” 요한 웨슬리는 이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대표적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이 나옵니다. 스데반은 짧은 동안 복음을 전하고,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마는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존경스러운, 그래서 너무나 부러운 신앙의 선배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함의 속성과 그 상태가 어떤가를 말해주는 분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여기 성령 충만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헬라말 원문이 ‘블레레스’ 라고 하는 이 말씀은, 곧 체험적 신앙을 말합니다. 그리고 합리적 이해를 말합니다. 그가 체험한 바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성의 거부가 없습니다. 이성마저 구원받아서 잘 소화하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이성적 비판의 충동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 이해가 되니까요. 그런가 하면 큰 감동이 있습니다. 모든 복잡한 문제를 다 넘어설 만큼 감동, 큰 감격이 있는 그게 충만 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그 그리스도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온전히 사로 잡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자기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원수도 이기고, 세상도 이기고 나약함도 이기고 슬픔과 탄식도 이깁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사람의 극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느끼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충만함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믿음을 얻어, 구원에 이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얻어 나와 세상을 이깁니다.
이러한 충만함-우리는 한번 봅시다. 오늘 스데반의 순교하는 장면에서 먼저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향해서 이를 갈았다 합니다. 이를 갈며 성 밖으로 내치며 돌을 던졌다 합니다. 여러분 간단히 생각해 보십시오. 왜 초대교회의 총지휘관은 베드로가 아니고 스데반입니까? 왜 사도가 아니고 집사가 먼저 죽느냐 이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 사람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지성인이요,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자 갈릴리 촌사람들’ 이 아니고, 헬라파 유대인이요 지성인, 당시로 말하면 세계 문화를 두루 꿰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인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고 복음을 전할 때 같은 동료, 왕년의 같은 친구 헬라파 유대인들이 여기서 용납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돌을 던져 법을 어기고, 스데반을 때려죽이게 되는 순간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들이 엊그제까지도 친구였던 사람들입니다.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돌을 던집니다. 거기에는 물론 오해도 많고, 문제도 많겠습니다만 그러나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스데반은 그거 상관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는 대로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땅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옛날 로마 황제 시이저가 암살당할 때 칼로 자기를 찌르는 친구 앞에 “너 마저!” 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네가 이럴 수 있느냐, 네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같이 가던 동지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네가 나에게 돌을 던지다니 …….’ 이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앞이 막히고, 뒤도 막히고, 옆도 막혔으면, 이제는 위를 보라’ 여러분, 한 순간이라도,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어떤 사건 어떤 상황이든지 먼저 위를 보십시오.’ 위를 보는 것, 그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기본자세입니다. 골 3:1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하였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합니다. 위엣 것입니다. 먼저 눈을 들어 위를 보고,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또한 “주목하였다”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습니다. 집중해서 보았습니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은 아니했다는 말씀입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안 본다는 뜻입니다. 집중적으로 주목해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리할 때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고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어서 올라 오너라. 하고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볼 때, 집중적으로 볼 때,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을 뵙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 내 생명을 바쳐 버립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내 생명을 바쳐버립니다. 내 미래를 바쳐버립니다. 내 운명을 맡겨 버립니다. 여러분, 뭐니 뭐니 해도 걱정치고 가장 큰 걱정은 죽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감기만 걸려도 ‘이러다 죽지 않을까’ 하고 종합검진을 갈 때마다 ‘또 무슨 중한 병을 걸리지 않았나.” 합니다. 어차피 죽을 거, 안 죽으려고 버둥거리지 맙시다. 죽음을 환영합시다. 적어도 믿는 사람은 죽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리고 저주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주님을 우러러 봅니다. 자기를 기다리는 주님을 쳐다보면서 그에게 생명을 위탁해 보였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했습니다. 죽음의 문제, 불안과 공포의 문제, 세상에 대한 미련, 다 접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위탁해버렸습니다. 여기서 그는 그 영혼이 자유하게 됩니다. 평안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합니다. 이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 그 원수들을 용서합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 원수사랑은 기본입니다. 가끔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할 때, “원수를 사랑하다니, 원수를 어떻게 사랑해? 그건 특별한 성인들이나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우리같이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한단 말인가?” 하고 말하기 쉽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오직 싸움만이, 투쟁만이 있을 뿐입니다. 쟁취만이, 혁명만이 있습니다. 결국은 모든 공산주의 나라들이 하나같이 못살고 하나같이 망했습니다. 왜? 저는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생각합니다. ‘저 복수심 때문에 망했다’ 그 미워하는 마음, 그 저주하는 마음, 그 싸우는 마음, 양육강식의 그러한 싸움이, 그러한 마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농사도 안 됩니다. 생각도 없습니다. 결국은 경제, 정치, 문화, 다 무너지고 말더라고요.
여러분이 누구를 미워합니까? 미워하고 있는 동안은, 나라는 생명을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도, 내 진실도, 내 소중한 건강까지도, 다 빼앗기도 있는 것입니다. 빨리 벗어나십시오. 조금이라도 누구를 미워하는 그림자가 있거든, 빨리 벗어나십시오. 거가에 매여 있어 헤어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이 기본입니다. 기초적인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야 내가 자유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영성가「끌레르보의 베르나르」가「The love of God」라고 하는 책에서 사랑의 4가지 단계를 말합니다. 흔히들 쉽게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마는 정리해 두었습니다.
첫 번째 사랑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육체적입니다. 나를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국은 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새는 하나님 사랑한다하지마는 따지고 보면 전부 자기 사랑입니다. 열심히 봉사해서 복을 받고, 열심히 봉사해서 칭찬을 받고, 축복을 받고 ……. 이 기복사상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신령한 세계에서 추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감동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구체적인 것이 없기에 곧 이 마음은 사라집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하나님을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내가 너무 소중하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너무 고마우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나를 사랑합니다. 여러분, 남편을 사랑합니까? 그러면 저기 자신을 사랑해야지요. 아이들을 사랑합니까? 아이들을 위해서 내가 건강해야지요. 부모님을 사랑하십니까? 부모님을 위해서 내가 명랑해야지요. 내가 낙심하고, 한숨 쉬고, 절망하면, 내가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아닙니까? 모름지기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구체성이 있어야 현실적으로 그 참 사랑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오늘 스데반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참 사랑의 사람이 되는 순간입니다. 또 하나의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을 했다는 것입니다. 행 6:15에 보면 스데반이 바로 그 순간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합니다. 우리는 천사를 본 일이 없지마는 천사의 얼굴이 어떠할지 짐작은 합니다. 바로 그것이 변화된 모습입니다. 위를 보는 사람,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원수를 다 수용하고, 사랑해버릴 때, 천사의 얼굴이 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자유하면서 마음이 천사가 되면 얼굴도 천사가 됩니다. 밝아지는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리하여 스데반은 마침내 사울이라는 제자를 얻게 됩니다. 여기 사울이라는 사람이 뒤에 바울이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한몫 했습니다.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마는 거기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스데반이 마침내 사도 바울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바울신학 책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스데반이 죽을 때 한 설교, 그 스데반의 사상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은 스데반의 제자인 것입니다. 「유토피아」를 쓴「토마스 모아」가 교수형을 당한 그 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유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죽을 때 옆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며 용서하며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었는데, 결국은 그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고, 한 평생 복음을 전하고 순교해서 하늘나라에서 서로 만나 영원한 친구로 행복하게 산답니다. 내 오늘 당신의 손에 죽지만 언젠가는 당신이 예수를 믿고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만나 나하고 영원히 친구로 함께 할 것을 믿소.”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스펄전」목사님이 하루는 기도하다 말고 훌쩍 훌쩍 우는데 사모님이 옆에서 왜 우느냐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느냐? 물었더니 이 목사님,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요새는 웬일인지 십자가를 생각할 때 감격이 없어. 이것은 신앙적 위기야” 여러분, 십자가를 생각할 때, 나를 위하여 지신 십자가를 생각할 때, 큰 감격이 있습니까? 그 감격으로 모든 것을 이깁니다. 이 감격이 메말라 바닥나면 삐꺽삐꺽 소리가 나고 문제가 생깁니다.
충만한 사람, 그에게 하늘이 열립니다. 충만한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아니, 어떻게 죽고 싶습니까? 사람은 잘 죽어야 되겠습니다. 제 때에 좀 근사하게 죽어야겠습니다. 이게 잘못되면 한평생 수고한 것 다 망가지고 맙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저 장엄한 순교를 보십시오. 그 영광된 시간을 보십시오. 부럽지 않습니까?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주님의 영접을 받은 저 스데반을 보십시오. 충만합니다. 그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습니다. 오직 밝은 마음과 소망과 영광과 천사의 얼굴이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