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6-11ㅣ김남수 목사]
안양 교도소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여러 번 세례를 베푼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한 청년이 그 목사님의 사무실에 찾아가서 하는 말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 예수를 믿고, 목사님께 세례를 받았다” 고 하였습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하였는데, 직장을 좀 알선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 청년은 전과 7범이었습니다. 자, 이 청년을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직장을 소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물쭈물 하면서 궁색하게 이렇게 얘기했답니다. “글쎄, 나는 목사지 직업소개소가 아닌데, 내가 직장을 누구에게 어떻게 소개할 수 있겠나? 또, 내가 자네를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잖아” 이런 말 저런 말을 했더니, 그 청년이 벌떡 일어서면서 “네 그럴 줄 앍았다고요. 사랑, 사랑, 하는 말이 다 거짓말 이예요. 목사님이 사랑, 사랑하고 외치셨는데 그게 다 거짓말입니다. 내가 그럴 줄 앍았지요.…….” 하는 게 아닙니까? 그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었답니다. 그러니 이거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그러자 그 청년이 또 한마디 합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우리 어머니가 저를 강보에 싸서 고아원 문 앞에 내다버렸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르고 고아원에서 살았습니다. 그 후 14살 때 고아원 담장을 넘어서 도망해 거리에서 살았고, 그렇게 거리의 청년이 되면서 전과 7범이 되었습니다. 자, 사랑이 어디 있단 말이에요? 어머니가 자식을 버리는 세상에 사랑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내가 그 증인입니다. 사랑은 없어요.”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정말 견디기 어려웠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지혜를 주셨어요. 그래서 청년을 앉혀 놓고,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내 하나 물어보자, 너 고아원에서 자랐다며? 고아원에서 자랄 때, 네가 스스로 유유 타 먹었느냐? 네가 스스로 기저귀 갈아 찼냐? 네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4살 이후 일이지, 그 전의 이야기는 모르고 있잖아? 네가 기억 못하는 어린 시절에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너를 먹여 키웠다는 말이지. 그러니 이거 잊지 말아라!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니까 의무적으로 키우고 돌보았다고 하자, 그러나 너는 아니야, 너와는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너를 돌봤어. 그래서 이 만큼 크지 않았느냐? 네가 농사 한 번 지어봤냐? 언제 돈 한번 제대로 벌어봤냐? 그런데도 이 만큼 먹고 살고 컸지 않느냐? 그건 사랑이 아니냐?”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 청년은 부모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청년, 그때서야 생각이 들어갔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고아원 장로님이 저를 많이 사랑해 주었어요. 많이 예뻐해 주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도망해 나와 살면서도 늘 그 장로님이 생각나곤 합니다.” 하더니 한참을 울었답니다. 그러고 나서 일어서서 나가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너 직장은 어떻게 하고?” 그랬더니 그 청년이 대답하기를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살 수 있습니다. 다시 교도소 안 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나가는데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답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가 알고 있고, 자기가 경험한 것만 사랑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세요. 내가 모르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사랑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하면서 받은 사랑이 얼마나 많은가? 그게 진짜거든요. 알고 보면 사람은 4살 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데요. 어머님들이 아이들에게 “내가 이 젖을 먹여 너를 키웠다” 고 말하지만 그거 자기가 보고 알아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저 믿음으로 믿어야지요. 아무도 자기가 젖 먹는 생각 안 나거든요. 생각나는 사람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아마 5살까지 엄마 젖을 먹은 사람입니다. 소중한 사랑, 가장 중요한 사랑은 모두 우리의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자신이 의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면 안 되지요.
그러니 자기가 알고 있고, 깨닫고 있고, 경험했기에 고맙다고 감사해하는 것은 별거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모르고 있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엄청난 사랑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먹고 삽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곧 사랑입니다. 문제는 사랑의 확증입니다. 분명히 사랑은 있습니다. 사랑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랑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사랑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건강의 최상의 비결은 웃는 것이라고 합니다. 더 재미있는 얘기는 웃음에는 도덕성이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웃음이든 웃음은 몸에 좋다는 말입니다. 설령 허튼 소리를 해서 웃는다 해도 웃으면 좋다고 합니다. 그러니 많이 웃어야 합니다. 웃는 게 최고입니다.
그런데 웃음보다 더 많은 엔도르핀을 내 놓을 수 있는 건강의 비결이 하나 있어요.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웃음보다 4배나 더 높은 엔도르핀을 생산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깨달아야 돼요.
다시 사랑의 주제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사랑은 경험하는 것 중에 몸으로 아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킨십’ 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안아주고 쓰다듬어 줄 때, 아이들이 좋아합니다. 이 사랑은 몸으로 아는 사랑입니다. 그 다음으로 정신적으로 아는 사랑이 있어요.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내가 어머니 젖을 먹던 것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 냅니다. 오늘 내가 있으니 그 사랑이 있는 것이고, 내가 있으니 부모님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 생각 속에서 사랑을 깨 닫습니다. 깨끗한 이성은 엄청난 사랑을 초래합니다. 자기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이 사랑은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아는 사랑이 있어요. 우리의 영적 기능이 하나님의 영과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접하면서 큰 감동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영혼이 소생함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할 때, 그것을 내 온 인격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분문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합니다. 사랑을 확증했다는 것이 뭡니까? 왜 확증을 하시는 겁니까? 알게 하자는 것이지요. 사랑은 이미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통해서 알리자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알게 하는 것이 확증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신 증거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주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됩니다. 이 증거를 통해서 원점으로 돌아가서 원초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만나야 합니다.
어머니하고 아들 둘이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공장에서 일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얼굴이 전부 곰보입니다. 그런 형편에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아이가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커가면서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마음이 상해서 집에 들어 와 엄마를 붙들고 따집니다. “엄마는 왜 곰보야? 왜 다른 엄마들처럼 예쁘지 못하고 곰보야?” 세상에 이런 불효가 어디 있어요? 그러나 어린아이는 철없이 그렇게 소리 지르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아이를 앉혀 놓고 말합니다. “네가 좀 더 큰 다음에 얘기하려고 했는데 부득불 얘기해야겠구나.” 하며, 숨은 사연을 털어 놓습니다. 아이 아버지가 공장에 다니다가 그만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그래서 아버지대신 어머니가 취직을 했습니다. 그렇게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유복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후 어린 아이를 숙직실에다 뉘어 넣고, 일을 하다가 중간에 젖먹이고 또 나가 일을 하면서 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숙직실에 불이 나서 타오르는데, 아이가 그 속에 있는데도 위험하니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들어가서 어린 아이를 가슴에 안고 나왔습니다. 다행히 어린 아이는 무사했는데, 어머니는 완전히 얼굴이 타 버렸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곰보가 된 것입니다. “자, 이래도 보기 싫으냐?” 고 어머니가 묻습니다. 아무리 철없는 아이지만 울면서 “어머니,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합니다. 그 후론 아이들이 “네 엄마 곰보다” 할 때마다, “아니다 우리 엄마는 천사다! 우리 어머니 같은 어머니는 없다” 고 자랑하며 다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아이가 어느 시점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알았습니까? 그 불길 속에서 아이를 강보에 싸서 나올 때 아이는 몰랐어요. 그 후 자라서 유치원을 다니는 그 시절까지도 몰랐어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의 흉하게 얽어 곰보가 된 얼굴을 보면서 비로소 사랑을 확증하게 된 것이지요. 사랑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 희생의 뜻을 모른다면, 희생의 뜻을 불신한다면, 사랑의 뜻을 모르게 됩니다. 오늘 성경 본문 11절을 보게 되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그 사람은 곧 우리의 기쁨과 행복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확증하는 증거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선물」이라는 베스트셀러 작가 스펜서 존슨이 최근에「행복」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의 가장 기초적인 태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줄 모르면, 이웃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끔찍한 사건 때문에 뉴스를 볼 때마다 얼굴을 찌푸립니다. 사람은 무자비하게 죽인 사람에 관한 뉴스를 생각해 봅시다. 그가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예 살고 싶지 않아요. 하루도 더 살고 싶지를 않아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의 생명도 사랑하지 않아요.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 자신의 생명도 사랑하지 않는 거기에 문제가 있어요. 그런고로 삶을 단순하게 생각해야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내면적인 성찰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최상의 자아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최상의 존재다. 나는 사랑을 받는 존재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소중해질 때, 비로소 이웃도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연약할 때를 생각하라” 유아였을 때, 사랑을 모를 때, 사랑받을 자격도 없을 때에, 우리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모를 때에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을 받았어요. 의로운 때가 아닙니다. 죄에 깊이 빠졌을 때에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죄를 지어도 죄 짓는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죄도 짓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 하나님께서 벼락을 치셨으면 끝났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죄를 지었다한들 그것도 은혜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주께서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또한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옛날에 한 아버지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동생이 말썽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이 동생을 나무랐어요. 동생을 막 때렸어요. 그러면서 “이놈아 네가 그 따위로 노니까 아버지가 너를 미워하지 않냐?” 했습니다. 아버지가 옆방에서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놈아 말조심하라. 이걸 알아야 한다. 자식인 너희가 잘하면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고, 잘못하면 아픈 마음으로 사랑한다. 사랑은 마찬가지다. 너희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하는 건 마찬가지다.” 내가 연약할 때,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 때 하나님 쪽으로 돌아봐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사람에 대한 경험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일생에 4번 죽을 뻔 했습니다. 한 번은 3살 때 아파서 할아버지가 저를 업고 산 넘어 병원에 가시는데, 병원에 가서 보니, 죽어 있어서 다시 업고 집에 돌아오셨는데, 집에 와 보니 살아났다고 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성인이 되어 과로와 청문회 등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질병으로 연대 병원에서 저의 주치의가 6개월 이상 못 산다고 사형 선고를 내렸었는데, 중풍 등으로 쓰러져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자 9개월 만에 치유해 주셨고, 건강을 되찾자, 또 세미나를 하자 또 쓰러졌는데, 2번이나 쓰러지고, 고쳐주시고 하며,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려 주셨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에게 그럴 때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좀 드라마틱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너무 평범하게 살아가니까 밋밋한 것이 마치 죽에 물탄 듯이 삽니다. 이제 문제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연약할 때, 내가 병 들었을 때에,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내가 모를 때, 벌써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이미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런 사랑 앞에서 내 소원이 이루어지느니 안 이루어지느니, 가난하니 부하니, 병 들었느니 건강하니, 하는 것은 더는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사랑이 너무 큽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현실로, 그리고 사건 속에서 자기의 사랑을 계속 확증하고 계십니다. 깊은 믿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하늘을 다시 한 번 쳐다보십시오.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그러면 들려올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너는 소중한 존재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랑을 확증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