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6-7ㅣ김남수 목사]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은 아마도 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일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늘 경험하고 이야기 하며, 또 그로 말미암아 근심하기도 하는 일입니다. 동물적인 고통과 인간적인 고통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굶으면 죽는다는 사실은 동물에게나 사람에게나 같습니다. 추우면 얼어 죽는다는 것도 동물에게나 사람에게나 공통되는 문제입니다. 비록 말로는 통하지 않더라도 그 아픔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동물과는 다른 차원의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인격자로서, 지성인으로서의 인간에게 으뜸가는 아픔은 바로 ‘후회’ 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을 못한데서 생기는 것이 후회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데서 후회가 생깁니다. 얼마든지 좋은 기회가 있었습니다마는 그 기회를 나 스스로 버렸습니다. 하지 않은데 대한 후회입니다. 이것이 아픔으로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생명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내 생명, 내 인격, 내 명예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 인격, 명예 역시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심리적 차원에서 사람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가 감정주도적인 인간성이요,
둘째가 지식 주도덕인 인간성이요,
셋째가 의지 주도적인 인간성입니다.
음식을 먹는 경우에 비유해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감정위주로 사는 사람은 음식보다 음식을 가져오는 사람의 얼굴을 중시합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있느냐 없느냐 기분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이 입맛을 좌우합니다. 심지어는 그것에 따라 소화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합니다. 강아지는 음식을 주면 옆구리를 차든 말든 뛰어다녀서라도 음식을 잘만 먹습니다. 소화도 잘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음식을 앞에 놓고도 몇 마디 잔소리만 들어도 소화가 안 됩니다. 소화가 안 되어야 사람입니다. 동물과는 또 다른, 이러한 차원을 가지는 것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감정주도의 인간입니다.
둘째는 누가 주느냐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만 음식 맛이나 영양가 따위만 생각하고 먹습니다. 누가 주고, 분위기가 어떻고, 식탁이 어떻고 하는 것은 아랑곳없습니다. 영양가만 있으며 그만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일을 지식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 결정해 나갑니다.
세 번째는 음식 맛, 영양가, 분위기 따위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살기 위하여 먹고 일하기 위하여 먹는 사람입니다. 음식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하루 세끼 먹으면 됩니다. 쓰면 약으로 알고 먹고, 달면 달구나 하고 먹지 까다롭게 입맛을 가리지 않습니다. 의지 주도의 인간성입니다.
이것은 모든 일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문제가 같은 맥락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현대인에게 문제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현대인은 실용주의적이요, 개인주의적이여, 합리주의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매사에 이치를 따집니다. 그러기에 용기가 없습니다. 결과에 희열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는 생을 산다면 참 유감스럽습니다. 화평과 기쁨과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으로 인해 행복하십니까? 지식으로 인해 행복하십니까? 지위와 명예로 인해 행복이 온다고 말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가장 중히 여기는 지식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 1:18) 공부를 많이 하면 근심이 많습니다. 현대 지성인에게 고민이 많은 것은 아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많은 만큼 용기가 없어집니다. 종국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따르라,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 - 먼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리하면 알게 된다. 평안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평강’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평강’ 이라는 말은 ‘샬롬’ 입니다. 구약 성경에만도 350회 나오는 대단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의미도 깊고 뜻도 다양합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도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는 말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은혜’ 는 헬라식 표현이요, ‘평강’ 은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이것을 복합하여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평강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웃과의 화목한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진실과 평안을 얻는 자유로운 관계를 말합니다. 또한 물질에 대하여 넉넉한 관계, 곧 물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다스릴 수 있는 관계를 평강이라 말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십시다. “하나님의 평강” 이라든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표현을 보면 평강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평강이 옵니다. 또한, 평강의 왕 예수님이 평안을 주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평안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마음을 나의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나의 환경을 나의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나의 세계를 나의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오늘 본문이 제시합니다. 6절 말씀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세계를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모든 평안의 기반입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염려’ 란 헬라 원어로 메림나우(μεριμνάω)라고 하는데, 이것은 메리조(μεριζω)와 누스(νοῦς)의 복합어로 되어 있습니다. ‘메리조’ 란 ‘쪼갠다’ 는 뜻이며, ‘누스’ 란 ‘마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마치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쪼개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염려 없이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이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하여 하는 염려는 마땅하나, 세상적인 근심은 갖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생겨나는 모든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께 기도로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염려와 근심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지 못할 때에는 그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어 마음의 병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병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잠 17:22).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때, 구하기 전에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에는 우선 기도와 간구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되 감사함으로 구해야 합니다. “기도” 란 일반적 기도를 말하고 “간구” 는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즉 특별한 문제를 가지고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이 간구입니다. 우리들은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긴급한 일에 부딪힐 때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은 들으시고 또 주십니다. 그리고 구하되 “감사함으로”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불만을 말하지 맙시다. 끌어 오르는 정욕과 미워하는 마음과 분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응답이 없습니다. 감사함으로 구해야 응답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부인은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늘 술시중을 해야 합니다. 더구나 술이 만취되어 돌아오는 날이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해서 그 시중들 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남편이 어지럽혀 놓은 것들을 다 정리하고 잠든 남편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는데 신세타령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저는 언제까지 이 모양으로 살아야 합니까?” 구슬피 울며 탄식하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성령이 감동하사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납니다. “감사함으로 기도드려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고 하셨지 ….” 그래서 고쳐서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감사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좌우간 감사합니다.” 순간, 스스로 마음이 감동됩니다. “그래도 과부 신세 보다야 낫지 않는가? 지금은 저 꼴이지만 언젠가는 사람이 될는지도 모르지. 고주망태가 되어서도 제 집 찾아오는 것 하나는 신통하다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니, 감사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더랍니다. 토요일은 특히 술을 많이 마셔서 주일날은 꼼짝 못하고 누워서 집을 보면서 아내보고 교회 나가라고 하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렇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웃고 있는데, 남편이 눈을 떴습니다. 밤중에 혼자 앉아 실실 웃고 있는 아내를 보자 남편이 놀라서 묻습니다. “ 여보! 왜 웃는 거요?”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그래요” 그 부인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하나 이야기 합니다. 남편이 다 듣더니 “나도 예수 믿어 줄게.”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이제 그 부인은 간증합니다. “내가 10년을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으시던 하나님께서 한 번의 감사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여러분, 불만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을 것입니다. 사정이 많은 것도 압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만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감사함으로 모든 사정을 아뢰어 보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을 가끔 보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신다고 하셨기에 다행이지, 얼굴을 보신다면 큰일 날 뻔했다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보기가 아주 흉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얼굴 표정이 어이하여 그리 우거지상입니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 하는듯한 분위기, 표정,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으로 내 생각으로 말미암아 평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사 평안한 것입니다. 내 의지로 인해 평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마음에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모든 것을 맡기면 그 결과로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지각” 이란 인간의 생각과 이성을 뜻합니다. “뛰어나다” 는 것은 비교를 넘어 훌륭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생각이나 이성으로는 도저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모든 지각을 초월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에게 “평강” 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 이란 인위적이거나 외적인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우리 안에서 변하지 않는 내적인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평강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을 지켜주십니다.
기도와 간구를 하면 두 가지 좋은 것을 하나님께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염려와 근심을 떨쳐버리고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의 평안으로 인해 기도응답을 확신하게 됩니다. 기도응답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마음의 평안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응답이 올 때는 이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안이 우리의 마음속에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염려와 근심을 없애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능력을 동반하게 됩니다. 여기에 생산성이 있고, 창조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강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과 관계 안에, 그 말씀에 순종하는데 평강이 있고, 평강의 비결이 있고, 창조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항상 지키시기를 주님께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