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4-7ㅣ김남수 목사]
사도바울은 본서가 결론이 가까워 오기 때문에 빌립보서의 요약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축복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할 3가지를 당부 겸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뻐하라, 관용하라, 기도하라- 이 세 가지를 가르쳐 주면서 축복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위해서는 항상 기뻐해야 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라는 말씀은 자신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다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덕을 세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 곧 윤리적인 문제에서는 관용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하나님과 관계에서는 기도하라는 것이 바울의 권면이자 당부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기뻐하는 마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관용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 이것이 축복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태도,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축복받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축복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사도가 말씀하신 이 세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l.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고 했습니다.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고 합니다. “기뻐하라” 는 빌립보서의 주제입니다. 기뻐하라 할 때 “기뻐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뻐할 일이 없는 걸”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을 조금 의역하면, 주님 때문에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세상 기쁨과 다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어떤 성취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안에서” 라는 말의 깊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주안에서 기뻐해야 합니까? 그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첫째, 죄 사함 받는 기쁨입니다.
그 은혜의 감격, 여기에 뿌리를 두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내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에게 사죄권을 행사하십니다. 죄 사함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만일 오늘 저녁이 내게 남겨진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죄 사함의 문제만큼 심각한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든 것이 시시해 보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문제는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내가 감추려한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맙니다. 심판을 받고야 맙니다. 그런데 죄 사함 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으로만 말미암아서 가능합니다. 이 죄 사함 받게 된 근본적인 기쁨, 이 기쁨은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죄 사함 받은 기쁨으로 충만해 질수만 있다면, 어떠한 슬픔이나 어려움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렀겠습니까? 죄 사함 받은 다음에는 죽어도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가 약속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죄 사함 받은 후에 고난을 당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고난은 나를 단련시키기 위한 훈련 과정이요, 결코 저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 받고 당하는 고통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 더 큰 은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감기에만 걸려도 걱정을 합니까? 꼭 벌 받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업 망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죄 때문에 망한다고 믿어지기에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완전히 받은 사람은 내 사업이 실패한다 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입니다.
죄 사함 받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특권을 누리게 된 기쁨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일꾼 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역에 내가 조금이나마 힘을 보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거룩한 일에 내가 참여해서 일한다는 것은 얼마나 보람이 있는 일입니까? 그 귀한 일에 내가 한 몫 거든 다는 것이 예사로운 기쁨입니까? 이 부족하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만민을 구원하는 그 거룩한 역사의 어느 한 모퉁이를 담당했다는 기쁨, 이것이 바로 원천적인 기쁨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돌로 된 지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축축한 감옥입니다. 2000년 전에 이렇게 쇠사슬로 사람을 말뚝에 비틀어 매 놓았었습니다. 이렇게 매인 상태에서 몇 해를 지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주안에서 기뻐하라” 고 말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주님과 더불어 당하는 영광스런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항상’ 은 ‘모든 환경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 이루어지는 절대적인 기쁨이요, “있다” “없다” 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사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고위층이라는 사람들의 구속 사건들은 다 상대적인 것에 관련된 문제들입니다. “있다” “없다”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기쁨은 절대적인 것이요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기쁨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그래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까? 예쁘게 웃는 사람입니다. 웃음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비웃는 웃음, 마지못해서 웃는 웃음, 반가운 척 웃는 웃음, - 이런 웃음은 다 그 얼굴에 나타납니다.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아 웃는 밝은 웃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얼굴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에 이어
ll. 사도바울은 둘째, “관용하라” 고 합니다.
관용은 5절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고 말씀합니다. 관용 “에피에이케이아(έπιέικεια)” 는 난해구절에 속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할 때에 여러 가지로 고쳐서 생각합니다. 인내, 부드러운 마음, 또는 절제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것은 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원은 깊이 살펴보면 ‘관용’ 은 ‘옳은 일보다 무엇인가 더 큰 것’ 을 뜻합니다. 세상에는 일단 옳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 옳은 일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일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생각의 폭을 좀 넓혀 봅시다. 세사에는 옳은 일도 있고, 그른 일도 있습니다. 이것은 옳다, 저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한 사람의 마음이 아플 새라 일단 너그럽게 봐주는 것입니다. 옳은 것보다 더 높은, 더 큰 것, 이것이 관용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가르칠 때에 잘못하면 때리기도 하고 책망도 합니다. 잘못한대로 다 잔소리하고, 다 때리려면 하루 종일 야단만 치다 말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아이들에게 관용을 베 풉니다. 좀 더 멀리 좀 더 넓게 이해해주고 봐 줍니다. 어려서 그러니까 몰라서 그러니까, 내일은 나아지겠지, 언젠가는 철이 들겠지 하고 말입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이 너무 잔소리가 심하고, 자기중심적이고 해서 못 견디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철 들면 나아질 것이라고 했더니 “지금 나이가 몇인데 철이 들어요?” 합니다. “그래도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래요, 더 들 때가 있겠지요.” 제 이야기는 결국 넓게 이해하고 길게 알아주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바라봅니다. 10년 후 20년 후에라도 좋습니다. 언젠가, 아니 나 죽은 다음에라도 좋습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하고 기다리는 것 - 이것이 관용입니다.
또한 관용은 깊고 차원 높게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바른 말은 바른 말입니다. 그러나 바른 말보다 더 높은 것이 있습니다. 참아주는 것입니다. 안다고 다 말하고, 보았다고 다 비판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것보다 더 큰 것, 이것이 바로 관용입니다. 관용과 기쁨은 병행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기쁨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까지 뻗어가는, 그런 의미의 기쁨입니다. 생산적인 기쁨입니다. 내가 기쁠 때에 관용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슬프고 짜증스러울 때에 무슨 말을 들으면 당장 화부터 내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여유가 있고, 기쁨이 충만할 때는 어떤 말이라도 너그럽게 봐주고 웃음으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잘못을 저지르면 책망도 하고, 때로 회초리를 들기도 하지만, 실은 그런 부모한테도 회개할 것이 좀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기분 좋을 때에는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봐주고, 내가 기분 나쁠 때에는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따지고 책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아이들은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어떤 때는 봐주고, 어떤 때는 야단을 치고 하니,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즈음 눈치 빠른 아이들은 ‘이것은 내 잘못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저 쪽 기분에 달린 것이구나.’ ‘엄마와 아빠가 다툰 후에는 꼭 나한테로 불똥이 튀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연쇄반응으로 되어 진 일임을 알게 됩니다. 이쯤 되면 나중에는 잘못을 저질러도 자신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저 쪽 기분이 어떤가, 공기가 어떤가, 그렇게 눈치나 보게 됩니다. 관용과 기쁨은 병행하고, 그 기쁨은 다른 사람한테까지 미치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기쁜 날 다른 사람도 기쁘고, 나 즐거울 때 다른 사람도 기뻐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옛날에 아주 덕 많은 분들은 환갑잔치 날이나 심지어 장례를 치르는 날에는 아예 ‘거지 잔치’ 라는 것을 했습니다. 옛날에 먹기 힘들 때라 그랬습니다. 이 처럼 우리 옛 어른들은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좋은 음식이 있을 때에 나누어 먹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어떻습니까? 전부 이기주의자가 되어서 남 생각은 하지 않고 나 좋으면 그만입니다.
사도 바울은 관용을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고 합니다. 관용은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알만큼 관용하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느니라.” - 이것이 이유입니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얼마 안 있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을 떠날 터이니 살아있을 동안에 관용을 베풀 라는 것입니다. 또 역사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입니다. 불의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의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사랑, 종말론적인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lll. 바울은 세 번째 권면은 “기도하라” 는 것입니다.
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고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대로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어떻게 됩니까?
사도바울은 7절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를 덮으면 내 근심 따위는 문제도 아닙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데 물질 문제, 경제문제, 세상문제가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근심은 심리적인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으면 슬픈 일 밖에 없어도 기쁘고, 아무리 고통을 당헤도 찬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떠나면, 만나는 일마다 모두 걱정입니다. 돈이 많으면 돈 지키느라 걱정, 돈이 없으면 없어서 걱정 - 이것이 팔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어야만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을 때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있고, 이것이 우리를 감사로 인도하고, 은혜로 인도하고, 약속으로 인도하고, 말씀으로 인도합니다. 또한 우리를 소망에 넘치게 하고, 감정적인 마음과 지적인 생각을 다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보면, 사람을 만날 때에 그 사람과의 좋은 관계는 생각나지 않고 꼭 나빴던 일만 생각납니다. 저녁 잠자리에 들 때에는 하루 종일 좋은 일만 많았건만 전화 한 통 받고 기뿐 나빴던 것, 싫은 소리 몇 마디들은 것만 생각납니다. 이렇게 되면 은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쁜 일만 기억되고, 나쁜 소리만 생각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의 생각을 좌우하셔야 합니다. 마음도 하나님의 평강이 지배하고, 생각도 그 평강이 지켜주실 때에야 지정한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바로 기쁨과 관용과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이 축복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일삼아 그려보고, 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