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1-3ㅣ김남수 목사]
사도 바울은 1-3장까지의 권면에서 교회에 일반적으로 주어진 권면을 사실상 끝마쳤고, 이제부터는 개인적이며 종합적인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4장에서는 구체적이며 솔직하게 빌립보 교회의 부조화의 원인이 된 인물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1-3절에서 합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4:1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는 3:17-21 까지의 권면의 내용의 결론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시민권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시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때, 영광스러운 유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아무것에도 유혹이나 이끌림을 받지 말고 항상 확신을 굳게 가지고 주님 안에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권면을 ‘나의’ 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전인격이 담겨 있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가 비록 사도였지만 그들에게 “형제” 라고 한 것은 같은 성영에 의해 새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같은 예수 영’ 이 들어오게 되면, 예수를 믿지 않는 혈육보다 더 많은 사랑이 가고 더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비록 형제 친척일지라도 안 믿는 사람들과는 영을 같이 나누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으므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그 속에 들어와 거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나는 한 영이 되고, 또 나와 이웃과도 같은 영을 나누어서 한 영이 되므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형제애가 4가지로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이 4가지 표현을 조용히 음미하고 명상해보면 마치 낭만이 가득한 고급 연애편지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여러분은 단 한번이라도 누구한테 이렇게 말해 본적이 있습니까? 누구한테서 그러한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밤낮 사랑, 사랑 말만 했지, 사랑을 느껴 보았어야 말이지요. 나의 사랑하는 사람, 나의 사모하는 사람,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느끼기는커녕, 면류관은 고사하고 굴욕이라고 생각하니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4 표현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랑, 그리스도 동기적인 사람입니다. 특별히 ‘나의 사랑’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1:1의 개인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요즈음 어떤 부인들은 남편을 소개할 때에 ‘제 남편’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우리 애 아빠예요’ 합니다. 당연히 나와의 관계를 기준해서 ‘내 남편’ 이라고 해야지, 왜?, ‘애 아빠’라고 합니까? 아이가 없었다면 무엇이라고 불렀겠습니까? 내 남편, 내 아내, 이렇게 나와야 관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의 사랑하는 자’ 라 하면서 이 사랑을 표현할 때에 “너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리라” 고 기꺼이 자기희생을 각오합니다. 희생,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둘째 ‘사모하는 형제’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모한다는 것은 ‘에피포쎄이토이(έπιπόθητοι)’ 그리워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사랑과 정성을 주는 것이요, 공간과 시간과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내 몸은 갈 수 없으나, 마음은 갈 수 있습니다. 내 간절한 마음은 늘 그곳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움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함께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정신적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행동은 아무리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장하려해도 참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영적 사랑, 정신적 사랑 그리고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셋째, ‘나의 기쁨’ 이라는 표현을 봅시다.
우리는 사랑하면 왜 그런지 눈물이 먼저 생각납니다. 그러나 참사랑이란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기쁨을 생산하지 못하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참 사랑은 사랑받는 사랑만 기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내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사랑을 하고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에 곧 내 마음에 기쁨이 옵니다. 그러나 아직 참 사랑을 모른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도 억울하고 분해서 못 견딥니다. ‘나는 왜 내가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고 있지 못할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아가페가 아닙니다. 사랑 받지 못함으로 인한 원망,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적고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느껴지는 피해의식 - 이것들은 모두 나의 사랑이 참 사랑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흔히 에로스라고 합니다. 아가페는 받는 사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만 가지고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내게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으로 흥분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아가페 사랑이요, 사도바울은 이것을 ‘나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사랑 자체가 그에게 큰 기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기뻤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1:3, 4에서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에 울적함이 있고, 섭섭함과 원망스러운 기분이 있다면 그 사랑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습니다.
내 사랑이 참사랑인가 아닌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가페 사랑에는 질투가 없습니다. 사랑이 병든 이유는 질투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할 때는 기쁨이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는 기쁨이 없습니까?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는 속된 사랑이요, 타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가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벨을 아끼고 감싸주어야 할 친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을 때에 그는 형으로서 “내 제사는 받지 않아도 네 제사는 받았으니 고맙구나, 동생아! 잘했다. 내 마음이 기쁘다.” 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 얼굴이 상하고, 일그러지고, 마침내 동생을 죽여 버렸습니다. 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질투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저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절대 고독해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성도의 형제애입니다.
넷째,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내가 영광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자랑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면류관’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두 가지가 있는데, “왕관을 쓰다” 는 ‘디아데마(διαδημα)'와 “면류관” 을 뜻하는 ‘스테파노스(στέφανοϛ)’ 가 그것입니다. 스테파노스는 또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운동경기에서 일등한 사람에게 주는 면류관, 요즈음 말로 하면 금메달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잔치 자리에서 귀한 손님을 높이 치하하기 위해 씌워주는 면류관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가슴에 큰 꽃을 달아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의 스테파노스는 축제의 면류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나의 면류관’ 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희들이 바로 내 승리의 표상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수고하는데 너희들이 내 면류관이요 영광이라고 자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린양 잔치에 초대 받아 함께 누릴 영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영광을 얻는 그런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영광을 얻고, 저쪽은 되도록 낮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높여서 상대방의 영광이 곧 나의 것으로 전달되고 수용될 때, 그것이 바로 참사랑인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의 “기쁨” 이며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최대의 “기쁨”은 그가 전도하여 구원한 영적인 자녀들이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모습은 그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습니다. “면류관” 이란 경주에서 이긴 자에게 주는 관으로써 기쁨의 상징으로도 표현합니다. 우리가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한 그 사람은 후에 천국에 가서 우리의 면류관이 됩니다. 이 면류관은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전도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면류관은 찬란하게 빛이 납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면류관의 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은 시들지 아니한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생명을 바친 사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은 천국에서는 빌립보 교인들이 그의 면류관이 될 것을 말하면서 이는 그의 달음질과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2절에서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지금 빌립보 교회의 문제점은 시기와 질투요, 거기에 따르는 분쟁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한 감사의 편지 지면을 책망하는 말로 어지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면류관’ 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 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 인 그들의 마음을 행여나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암시적이요, 적극적이요, 창의적인 높은 차원에서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미 2장에서도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라” 고 권면했습니다. 이 정도면 알았을 것이니, 이 4장에서는 “하나 되라” 고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한마디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고 말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2절에는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나오는데, 아마도 이들이 교회 분쟁의 양대 세력이었던 모양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조심스럽게 충고합니다. 충고 가운데서 하나 되는 비결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는 것입니다.
생활을 같이하다 사업을 같이 하다는 등 눈에 보이는 것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 되라고 합니다. 어디가지나 심령의 문제입니다. 좀 더 깊이 말씀드리면 인권의 문제도 아니요, 신앙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하면서 ‘주안에서’ 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려 하고 한다고 해서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서 “I love you.” “ You love me” 한다고 하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을 하나 되게 하는 구심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네 옛날 부부들을 보면 그리 친하게 지내지 못하고 닭이나 소를 몰 듯 하는 관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되고, 이 구원받는 간증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3절에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고 합니다.
두 번째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라고 합니다.
함께 복음에 힘쓰던 자라고 합니다. “멍에를 같이 했다” 는 것은 협력자라는 것이요, ‘쉬쥐고스(σὐζυγος)’ 라는 말인데, 일찍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에서는 밭을 갈 때에 황소와 암소 두 마리가 멍에를 끌고 갑니다. 따라서 두 마리는 보조가 맞아야 합니다. 한 마리가 다른 소보다 빨리 가거나, 더디 간다면 빙 돌아 버립니다. 두 마리 소를 같은 보조로 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어느 한 쪽이 앞서거나 뒤져도 안 되고, 가다가 한 마리가 숨을 돌리고 쉬어도 안 됩니다. 두 마리가 똑같이 발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멍에를 같이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멍에를 같이 했다’ 는 말은 부부간을 말할 때 쓰는 말입니다. 동업자 간에도 이 말을 씁니다. 동반자요, 가까운 협력자라는 뜻입니다. 적당히 협력하는 관계입니다. 똑같이 균형을 잡은 동반자이며, 책임도 똑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쪽이 무너지면 저 쪽도 무너집니다. 이쪽이 갈 때는 저 쪽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동반자의 걸음입니다. “나와 함께 멍에를 같이 한 자” 란 이토록 절실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유기적이요, 균형 잡힌 공존의 관계인 것입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것입니다.
또 3절에는 “복음에 함께 힘쓰는 자” 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위해서 힘을 똑같이 합친 소중한 지난날의 업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했다면 실로 굉장히 가까운 사이입니다. 더구나 빌립보 교회 초기에 교회의 설립을 위해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헌신도 아낌없이 했습니다. 매도 맞고 위험도 함께 겪었습니다. 그처럼 핍박을 당한 지난날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제 하나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날을 협력하여 이루어 놓은 거룩한 사업과 업적을 생각할 때, 오늘의 사소한 문제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시기 질투를 할 수 있는가?”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따져서 무엇 하겠다는 것인가?” 오직 지난 날 함께 멍에를 메었고, 복음 전파에 한 마음으로 힘썼다는 그런 각성과 인식을 가질 때에 자연히 하나 될 수 있다고 바울은 그 비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도우라” 고 두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극적 봉사의 자세를 취하라는 뜻입니다. 언제나 협력하는 자세로,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대체로 분쟁하고 시비를 벌일 때에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소극적이 됩니다. 나쁜 말로 하면 “될 때로 되라” 는 자세입니다. 깨질 테면 깨지라 망할 테면 망해라 하고 자빠집니다. 이런 경우에는 좀 더 큰 안목을 지닐 줄 알아야합니다. 이것이 과연 덕이 되는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우리 교회에 유익한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이와 같이 큰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무모한 것입니다. 사움을 위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니까 좀 더 도울 생각을 하고, 저 사람을 비판하려하지 말고 내가 저를 돕도록 하라. 약한 점도 돕고, 그가 하는 일에 협력하는 자세를 취하라 - 이렇게 할 때에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 고 말합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인식입니다. 서로 사이가 좋든 나쁘던 어차피 천당 가면 서로 만날 사이요, 오늘 보고 그만 둘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 믿는 한 천당 갈 것입니다. 나 보기에는 나쁜 사람인 것 같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다” 또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 생명의 면류관은 나만이 아니라 너희에게도 주실 것이니 그 때에 만나자는 종말론적 친교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교제란 이래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는 자라도 예수 믿지 않으면 그 사람과는 이 세상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늘나라에서 만나야 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날에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치 비판하고 헐뜯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손해를 입힌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것인가?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 그러니 지금 네 기분에 맞느니 맞지 않느니, 네 의견이 나쁘다니 틀리다느니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함께 생명책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간 믿음의 조상도 만나야 되겠고, 먼저 간 형제자매, 그리고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도 불과 몇 십 년 만에 하늘나라에 가서 또 만나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합니까? 시기와 질투 시험에서 벗어나 하나 되기 위하여 우리가 주안에 있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멍에와 같이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돕고자 하는 종말론적인 친교의 재확인할 때에, 진정한 하나 됨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