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7-12ㅣ김남수 목사]
6.25 한국전쟁 때 UN군이 국군과 함께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UN 군은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퇴하는 중에 해병대 한 중대기 어려움을 만나 산골짜기로 피하게 됐고 중공군이 그 골짜기를 포위하여 망을 좁혀 오고 있었습니다. 시시각각 위험한 순간이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이 해병중대는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습니다. 모두들 낙심하고 있는데 젊은 병사 하나가 콩 통조림 하나로 시장기를 달래고 있다가 그 옆을 지나가는 종군 기자의 질문을 받습니다. 종군 기자는 그 병사가 너무나도 측은해서 위로할 겸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소원이 뭐요?” 이때 병사가 대답한 말이 너무나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Give me tomorrow (내일을 주시오).” 그렇습니다. 내일이 있다고 믿는 것과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나만 죽으면 그만이다” 하는 사람입니다. “나만 죽으면 끝이다.” 이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나를 괴롭힌 저 사람을 죽이면 그만이다.” 하는 사람입니다. 이건 더 무서운 사람입니다. 죽여서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인류에 많은 독재자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 지구촌 여기저기에 전쟁보다 훨씬 더 무서운 독재자의 폭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독재자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적을 숙청하므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누구든 나를 반대하는 자는 모조리 숙청해버리면 된다 하는 사람입니다. 이북 김정은 같은 독재자는 장성택 고모부도 죽여 버렸습니다. 군인들의 별을 붙였다 떼었다하고, 눈에 가시 같은 사람은 다 죽여 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독재자가 무서운 사람이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잘 믿거나 못 믿거나 간에 부활 신앙이 없는 도덕과 윤리가, 그리고 종교, 선과 의와 사랑, 이 모든 것이 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부활 신앙이 없고 내세가 없다면, 그 많은 의로움, 고난, 의미가 없습니다. 그 뼈아픈 인내와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 희생에 무슨 가치를 부여할 것입니까? 그런고로 임마누엘 칸트의 말대로 부득불 내세의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모든 가치관이 무너지고 마니까요. 생명의 문제는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수없이 장례식을 치릅니다. 임종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죽음이 뭔지를 모르겠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보지 못했으니까요. 내가 죽을 때까지는 죽음의 문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더 더욱 사후의 문제, 항상 신비롭게 우리에게 남아 있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 사건과 부활 신앙은 같지 않습니다. 부활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주께서 이루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엄연한 사건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내가 믿을 때까지는 이 사건의 의미가, 그 능력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시는 대로 예수님 부활하신 다음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고도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비겁한 자가 됐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함으로써 비로소 부활신앙을 가지게 될 때,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는 담대함, 순교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위대한 부활의 증인들이 됐더라는 것입니다. 마땅히 부활사건에 따르는 부활신앙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역시 부활은 생명의 문제요, 신비로운 것입니다.
「가이드포스트」지에 어느 목사님의 재미있는 경험담이 실려 있습니다. 조지 모건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시골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인이 그리 많지 많은데 어린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부활절 전 주일에 아이들에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속이 텅 빈 예쁜 계란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주었습니다. 주면서 “여기다 생명을 담아 오너라.”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서 나름대로 궁리했습니다. 생명이 뭘까? 생명을 여기에 넣어가지고 오라는데 ....... . 그래서 곤충도 잡아다 넣고, 꽃을 꺾어서 넣기도 하고, 저마다 나름대로 생명이라고 여기는 것을 하나씩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아이들 중에 너무 몸이 약해서 휠체어를 타고 교회에 나오는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텅 빈 플라스틱 계란을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은 안스러웠습니다. “이 애는 몸이 약하니까 곤충채집도 못하고 이렇게 빈 것을 가지고 왔구나.” 생각을 해서 그 아이보고 “너는 숙제를 못했구나. 그러나 괜찮다. 못 할 수도 있는 거지 뭐” 하고 위로했더니, 이 아이 보십시오.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나는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생명을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무덤도 비어 있지 않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할 말을 잃고, 이 아이를 끌어안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생명 자체를 본 일이 있습니까? 생명을 무엇으로 말할 것입니까? 생명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의사가 핀셋으로 잡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이 생명이다” 하고 뭐 내세우지 못합니다. 생명은 신비로운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 있어서 오늘도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명, 아주 중요합니다. 생명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1) 먼저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식물적 생명이 있습니다.
식물이 자라나는 것, 말라빠지고 죽은 것 같은 나뭇가지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것, 신기합니다. 식물적 생명의 단계입니다.
2)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생명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동물적 생명이 있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식물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 다 생명입니다.
3) 신비로운 것은, 더 놀라운 것은 인간적 생명입니다.
식물도 아니고 동물도 아닙니다. 더 높은 차원의 만물의 영장 인간이라고 하는 생명체를 우리가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되, 설명을 다 할 수 없고, 여전히 신비로운 것입니다.
4) 그러니 한 단계를 더 알아야 됩니다.
그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이 틀리는 생명이 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적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적 생명의 단계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절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첫 열매가 되셔서 사람이 죽고 사는 인간적 생명, 그 차원 다음의 세계를 우리에게 환하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부활절입니다. 예수 부활 생명의 단계, 이것을 바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결코 자연적 현상이 아니요, 윤회적 현상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입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부활은 옛것의 발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옛것의 죽음에서 다시 나오는 새 생명의 세계를 말합니다. 여러분, 분명하게 알고 삽시다. 부활이란 진화적 생명이 아닙니다. 부활 생명은 하나의 생명의 변화입니다. 생명은 살아있기에 계속 변화합니다. 부단히 변화합니다. 먼저, 죽음 지향적, 사망 지향적 변화가 있습니다. 여기 꽃이 있습니다. 곧 시들어 죽어버립니다. 또한 썩습니다. 모든 생명은 죽어 썩어 없어집니다. 계속 죽음으로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역설적으로 이 죽음의 거름더미에서 나오는 장미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것 같은데 그 속에서 생명이 나옵니다. 다 죽은 시체 같은 곳에서 솟아나는 생명을 봅니다. 생명 지향적 변화,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높은 변화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부활 생명 지향적 변화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활이라는 말과 변화라고 하는 말을 거의 같은 말로, 같은 술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다. - 부활 변화, 생명의 변화, 부활 지향적 생명의 변화, 여기에 부활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부활이란 부활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부활케 하시는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증언 중에도 들을 수 있습니다. 행전 2:32절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하였습니다. 윤회가 아닙니다.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진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36절에 보면“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 거기에 주도권이 있습니다. 또한 행정 3:13에 보면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주가 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ㅡ 하나님 그의 창조적 역사, 그것이 부활 생명의 근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부활의 권능, 그것을 알려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진실하게 말씀합니다. “그 부활이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연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의로운 고난, 거기서 부활로 이어집니다. 사망의 권세를 넘어서는 아가페적인 뜨거운 사랑이 있고, 그리고 부활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이 신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의 문제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부활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것을 말씀하는 것이요 우리의 의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이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이요, 그의 사심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확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생명일 뿐 아니라, 의롭다 하심의 역사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부활의 권능을 알았습니다. 부활의 권능 ㅡ 죄, 사망, 질병, 마귀를 이깁니다. 죽은 자도 살아납니다. 생명을 줍니다. 더 확실하게 알려고 힘썼습니다.
인도에「썬다 씽」이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때 영국을 방문해서 연설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감동을 받았습니다. 유명한 교수가 그에게 핵심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의 유명한 학자요, 또 힌두교인 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됐습니까?” 「썬다 씽」이 대단히 중요한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 부활 때문입니다. 기독교에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생무상, 끝인데, 기독교만이 생명의 종교인 것입니다.
제가 장례식 때 시신을 안장한 후 “여기서 이젠 묻어버리지마는 예수 재림하실 때 무덤을 깨치고 다 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기독교 생명은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생각합니다. 이 신비로운 능력은 어떻게 알 것이냐고 “죽으심을 본받아……. .”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 2:20에 외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십자가에 못 박혔다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아침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갈 5:24에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확실한 믿음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자세히 더듬어 보십시오. 아직도 덜 죽어서 그렇습니다. 예수 때문에 죽어야 됩니다. 내 욕심도 내 생명도 내 체면도 죽어 버려야 됩니다. 이제 가끔 느낍니다. 훌륭한 학자들이며 아주 상당하던 분들이 나이 좀 들었다고 치매에 걸려서 딴 소리 하는 걸 보면 그 안다는 게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하찮은 것입니다. 뭘 내세우겠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죽어버립시다. 죽어지는 것과 죽이는 것은 다릅니다.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립시다. 다 십자가 앞에 죽어 버립시다. 그럴 때 부활의 능력을 오늘도 신비롭게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의심은 계속 남습니다. 마 28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 앞에 경배합니다. 눈앞에 예수님을 보면서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ㅡ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여전히 신비로운 의심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는 자 다운데서 찾느냐?” 감사 감격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절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있어서 내일을 믿는 것아 아닙니다. 내일이 있기에 오늘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어서 부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 있기에 오늘을 살고,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 그것을 알고 좋아하십니까?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고 죽으심을 본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엄청난 생명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의 사랑, 그의 용서, 그의 능력, 그의 승리, 그리고 저 부활의 아침 - 오늘도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