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0-16ㅣ김남수 목사]
지난 주에 말씀 드린 것을 간단히 요약하고, 바울 사도의 미래 지향적인 신앙의 결심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10, 1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했습니다. 안다는 것은 개인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원리나 이치, 혹은 어떤 진리를 내가 배워서 깨닫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체험적으로 알고 개인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무엇을 알았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핵심 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1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려하여”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길은 부활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아는 가장 핵심적인 사건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부활의 능력을 자기가 참여하여 알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의 권능, 사망을 이기는 능력, 그 놀라운 다이내믹한 능력을 내가 체험하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부활의 능력인 영생을 얻었고 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불치의 병도 치유하는 기적도 행합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그 분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부활의 능력을 알고자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관한 한, 그리스도 고난의 의미를 안 다음에야 부활의 권능의 의미를 알게 된다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11절에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죽음이라는 터널을 통해 부활에 이르려한다고 바울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다 죽은 후에야 부활이 있습니다. 죽지 않고 팔딱거리면 부활을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부활의 능력에 있는 신비를 알고, 감격하여 그 안에서 능력으로 생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내 생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처럼 죽고 그리스도처럼 살며,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속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빌립보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불편한 몸을 가지고도 늘 감사하며,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었고, 온 세계를 바꾸어 놓은 큰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12-16절에서 바울 사도의 미래의 지향적인 신앙에 대한 결심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란 그가 세운 목적만큼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인생의 성공 여부는 그가 세운 목적에 달려 있습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가진 고민이나 근심이나, 행복이나 불행도 필경은 그가 자신이 세운 목적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을 잘못 세우면 그것이 곧 실패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바울은 그가 세운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에 따른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야말로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 생을 살았습니까? 그는 과연 위대한 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가 목적을 세웁니다. 내 욕망을 따라 세우거나, 어떤 때에는 남이 세운 목적이 좋아 보여 그것을 따라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이 처한 입지나 자신의 달란트는 전혀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이 세운 게 좋아 보여서 “나도 저렇게 한 번 해 보았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놀라운 일입니다마는 그가 스스로 세운 목표나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세워 준 목적을 따라 자신의 목적으로 삼은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제가 예봄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의 목표를 세울 때,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3대 사역을 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받아 사명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결심하고 목표를
*성령 충만한 교회
*전파하는 교회
*가르치는 교회
*치유하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이 목표를 세우고 달려왔는데, 그간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고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치유 사역을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를 통해서 행하셨습니다.
본문 12절은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쫓아가노라”고 했는데, 이것의 원문의 의미는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올림픽 경기 때 100m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을 보면, 몸을 땅에 기울이고 “땅” 하고 소리가 나면 총알같이 내 달리지 않습니까? 온 몸으로 기울이며 앞으로 달려가는 선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선수에게는 오로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온 힘을 다해 달려가는 것 밖에는 생각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경주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총력을 기울여 경주하는 것이고, 자기 생애를 그 과정에 두었습니다. 쫓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자기의 생애라는 것입니다. 경기장에 선 자기, 이미 출발해서 막 달려가는 그 현장, 이것이 “나 바울” 이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잡힌바 되었다는 것”은 사도바울이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일까요? 바울에게는 이것이 추상적인 이론이나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가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본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다 알 수는 없으나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바울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히브리 종교에 능통하고 정통 바리새파이며, 학문으로는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을 제일 우러러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철학에 능통한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 못지않은 공부를 하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을 제일로 쳤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학문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모든 것에 능통한 “가말리엘”과 같은 사람이나 “필로’ 와 같은 인물이 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본래 그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이 열심은 말로만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한 히브리 종교, 또한 스스로 생각한 철학적 이론에 위배된다고 할 때에는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데 가담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저런 사람은 죽여도 된다.” 고 생각할 만큼 극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을 수가 없어 도망 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공회에 세워 놓고 말살을 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행전 9장에 보면, 그 때에 하늘에서 환한 밝은 빛이 내려옵니다. 그것은 밝은 정오입니다. 만약 밤 12시에 그랬다면 꿈으로 돌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기도 시간도 아닙니다.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대낮하고도 정오에 환한 밝은 빛이 내려옵니다. “사울아” 하고 부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는 꿇어 엎드리게 됩니다. 그는 아주 야무진 사람이라 그런 경황 중에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묻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얼마나 대담한 사람입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마침내 바울은 예수님의 포로가 됩니다. “잘못 했습니다.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직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다메섹으로 가라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일방적인 통보입니다. 바울은 그 길로 다메섹으로 들어 가 아나니아를 만나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한 마다로 예수 포로가 됩니다. 지금까지 하려 했던 거 다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 수양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완전히 예수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몸, 생각이, 신앙이, 이상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표와 목적까지도 바꿔버렸습니다. 이것이 곧 바울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수단을 예수께로 바꾼다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예수께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어느 때, 어느 형편에서도 그 목적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바로 이런 것을 뜻합니다. 혹 방법이야 자기가 살아 온 배경에 따라서는 조금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 목적이 하나님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목적에 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나는 예수께 잡혔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나는 온전히 그리스도께 포로가 되었다” 고 고백합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스스로 선택해서 예수를 믿었습니까? 예수 믿는 것은 절대로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예정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나는 도망가려고 애썼는데, 하나님께서 강제로 나를 붙으셨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끊어버렸습니다. 마지막에 붙잡혀서 “주여!” 하고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자유가 없다 나는 다메섹에서 포로가 되었다 나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신앙 간증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포로 됨에는 목적이 있다고 바울이 말합니다. 그저 막연히 나를 불러 놓으신 것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하나님의 경륜이 있어서, 그 어떤 계획이 있어서 나를 붙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 깊으신 뜻이 있어서, 그것을 위하여 쇠사슬에 곽 묶어놓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12절에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하는 말씀 중에서 “잡혔다는 것” 은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요, 수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잡으려고 쫓아가는 것은 능동적이요, 자원적이요, 감사에 넘치는 것입니다. 거기에 바울의 위대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끌려가면서도 죽을 때까지 징징 거립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붙잡힌 이상 “아이고 틀렸다‘ 하고는 전에 좋아하던 것 다 버리고 감사하는 마음이 됩니다. “붙들린 것 감사합니다.” 하고는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쫓아갑니다.
다음, 본문에는 좀 더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달려가는 그 현장에서 그가 느끼는 것은 12절에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다시 말하면, 미완성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히 이루었다” 는 것은 헬라어로 “테텔레이오마이(τετελεἰωμαι)” 인데, 이 말은 완성을 뜻하는 철학적 용어입니다. 충분히 성숙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이루었다” 함은 성숙한 제자, 그리스도의 의로서 세례 받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순교하게 되면 언제라도 “예”하고 죽을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스로 아직 순교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만한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고 고백합니다. 다만 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진실하고 솔직한 고백입니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천사의 얼굴로 찬송하는 것을 본 그로서는 스데반의 그런 모습이야말로 완성이요 성숙인데, 자기는 아직도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때로 우리는 자신을 너무 과시합니다. 남이 참았다고 하면 그까짓 참을성이야 내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일입니까? 훌륭한 교인이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마다 “과연 나는 그 절반에도 미칠 수 있을 까?” 하고 자신을 살피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오히려 더 강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완선 중에도 스스로 완성을 생각하는데, 여기에 두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 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건망증도 좀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하던 잘못한 것, 취미, 그릇된 습관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려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누구나 체험하는 일입니다마는 우리는 보통 기억이 안 나서 괴로울 때 보다는 잊어버려야 할 것을 못 잊어서 괴로울 때가 더 많습니다. 그 악몽 같은 추억, 이런 것은 빨리 잊어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잊어버려지지 않아 가슴 펴고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이 게임하는 것을 유심히 보면 어떤 선수는 거듭 거듭 실패를 합니다. 그것을 중계하는 아나운서가 말합니다. “저 선수, 지난번에 실패한 것을 어서 잊어버려야 하는데 ….” 참으로 정곡을 찌른 말입니다. 잊어버리지 못하므로 조심하다가, 또 실패할까봐 벌벌 떨다가 또 다시 실패한 것입니다. 실패한 것만이 아니라, 지난날 이겼던 것도 기억할 것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입니다. 다 잊어버리고 언제나 처음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대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화려한 경력도, 어두운 이력도, 이 시간에는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둘째, 14절에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달려간다.” 고 했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말씀입니다. 온몸을 기울여 앞을 향해서 달리는 선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 달려가는 일에 두 가지를 더 구체적으로 강조합니다. 하나는 푯대입니다. 또 하나는 위에서 부르신 상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상만을 받아들입니다. 사람의 칭찬이나 비판 같은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푯대를 바라보고, 위에서 부르는 상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지금 우리가 볼 때에는 사도 바울이 위대합니다. 그러나 고전, 살전, 행전을 보면 그는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믿는 사람, 유대인, 그리고 주님의 일꾼으로부터 그는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그리 높이 칭찬 받던 위대한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바울은 끝까지 위에서 부르신 상만을 바라보고 쫓아갔던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또 한 번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계시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16절에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라” 고 합니다. 너희가 어디까지 달려왔던지 뒤를 돌아보지 말고, 궤도 수정하지 말고, 그대로 앞으로 밀고 나가라, 추진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귀한 명령이요, 또 자기 신앙의 간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