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6:1-3ㅣ김남수 목사]
미국교회는 어머니 주일을 지킵니다. 어머니 주일을 지킬 때 어린학생들에게 늘 이야기하는 중요한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중요한 실제적인 교훈이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존경하고 누구나 잘 아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톤은 어렸을 때의 꿈이 뱃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원이 되고, 마침내 선장이 되고, 바다를 헤쳐 나가는 그런 뱃사람이 되겠다. 생각하고, 우선 선원이 되어야겠다며, 짐을 다 꾸려 가지고 하인들과 함께 이제 배를 타러 나가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났을 때, 어머니는 큰 뜻을 품고 집을 나가는 이아들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아들의 손을 잡고 그대로 울기만 합니다. 워싱톤은 그때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내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어머니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내 꿈을 좇을 수는 없다. 꿈을 포기하고 “짐을 내려라” 도로 짐을 풀어다 놓고, 어머니에게 순종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되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를 떠났더라면, 그가 잘해야 선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큰 뜻을 품고 준비했던 것도 버리고 어머니의 마음을 따랐습니다. 왜요? 어머니가 나보다 지혜로우니까요. 어머니의 인격을 높이고, 어머니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를 높이고 높여 순종한 것입니다. 공경이란 그를 높이는 것이요, 그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내 어머니는 이런 분입니다. 그 분은 이렇게 훌륭했습니다. 항상 마음속에 부모에 대한 긍지와 자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I. 오늘 본문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공경이란 대가성 없는 사랑입니다. 공경해서 무얼 받아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거레가 아닙니다. 질투 없는 사랑은 오로지 효 하나 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또한 이 사랑에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 소원에 대한 응답입니다. 어머니의 소원, 아버지의 기도, 그것을 알고 그에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경입니다. 내 생각아 아무리 많더라도 아니요, 그 소원을 우선해야 됩니다. 어머니의 소원은 선합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의로운 것입니다. 때로 부모님이 공부해라, 공부해라, 입버릇처럼 하지만 알고 보면, 거기에는 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제 때에 공부를 못해서 이렇게 늘 답답할 때가 많다. 그런고로 너는 공부해라’ 이런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그 속에 소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정직하게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모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효는 가정교육의 기초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부모를 순종하라” “부모 공경하라” 두 가지입니다. 순종이란 복종이 아닙니다. 순종입니다. 순종은 기쁜 마음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공경은 헬라어로 ‘티마’ 라고 하는 이 말은 특별한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유일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요새는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그저 친한 정도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높이 섬겨라’ 낮춰 사랑하는 게 아니라, 수평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높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공경하라-높이 섬기라, 이것입니다. 이것은 존경입니다. 그리고 그의 옳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II. 그런데, 어버이 주일을 보내면서 성경에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식을 어떻게 다루라고 하셨는지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경고를 받고, 잘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매우 엄하게 말씀합니다.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스라엘의 처형 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끌어내어 성 밖에 나가 온 동네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집니다. 마침내 커다란 돌무더기가 될 때까지 돌을 던집니다. 이 돌무더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가 됩니다. 이 같은 죄는 용서받지 못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1:21에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렇다면 어떤 죄에 대하여 이 같은 심판을 내립니까?
출 21:15절에 말씀입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부모를 치는 자식이라면 구태여 잘잘못을 가릴 여지도 없습니다.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부모에게 손찌검하는 자식을 끌어내어 쳐 죽입니다. 이유 불문입니다. 용납할 없습니다.
다음의 경우는 출 21:1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부모가 빨리 죽으라는 사람, 말로 저주하는 자식은 그대로 끌어내어 죽이라고 합니다.
또한 마 15:4에 예수님이 인용한 말씀입니다.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로써 부모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돌로 쳐 죽이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인용하신만큼 확고한 계명의 말씀이요, 권위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이렇게 생각해 보니 우리들 가운데도 죽을 사람이 참 많습니다. 왜 사람들이 죽겠다. 죽겠다. 하는가. 했더니 이렇게 죽을 죄를 지은 탓입니다. 죽을 죄를 지었으니, 그 고통이 오죽 하겠습니까? 그러니 죽지 못해서 살면서 말끝마다 “죽겠다.” 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많기 때문에 사회 또한 이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공경한다는 말은 높이 우러르는 마음입니다. 존경하며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미 사랑을 받은데 대한 감사와, 고마움과, 경건을 합쳐서 응답하는 사랑입니다.
III. 마르틴 루터를 비롯하여 종교개혁자들은 4종류의 부모가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루터는『대요리문답』이라는 교리서에 이것을 상세히 설명하여 교인들에게 암송하도록 할 정도였습니다.
첫째는 나를 낳아 준 부모입니다.
나를 낳아서 먹이고, 입히고, 키워준 부모입니다.
둘째는 영적인 부모입니다.
교역자 목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교역자를 불러 신부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Father"- 글자 그대로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교인들을 대할 때 ‘….하게’ 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마땅히 ‘….하게’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교역자와 교인이 수직적 관계에 있습니다.
셋째로, 내게 지식을 공급해 주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소위 사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스승을 일컫는 말입니다. ‘랍비’ 라는 말에도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넷째로, 정치가를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정치를 잘하든 못하든, 왕을 훼방하는 자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잘하든 못하든 일단 그 자리에 있는 한에는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들이 곧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IV. 그러면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됩니까?
부모님의 마음은 언제나 선합니다. 부모님은 설령 자기는 악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자식은 착하게 살기를 바라고, 자신은 실패했더라도 자식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자신은 거짓되이. 살았다 하더라도 자식만은 진실하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이 같은 마음을 두고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부모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분이다” 부모의 선하시며 인자하심을 인정해 드리면서 감사와 존경과 순종과 기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효도입니다.
그러면 부모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공경해야 할까요?
1. 부모님의 마음의 심려를 덜어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의식주를 제공해 드린다 할지라도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도덕적으로 건전하게 살아야 합니다. 밤낮 술 먹고, 도박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불효한 사람입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식은 부모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크리스천 자녀는 주 안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이야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자녀는 건강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자식이 병들어 시름시름 앓고 있으면, 부모의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나아가서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자녀는 부지런히 일을 해서 생활고에 허덕이지 말아야 합니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자식을 둔 부모는 그 걱정으로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통해 해방을 얻은 백성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믿음을 지키면 정직, 성실, 근면, 충성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넘치는 복을 주십니다.
2. 부모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부모가 자식으로 인해 즐거움을 느낀 부모는 인생의 가치와 보람을 느끼며 노후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 자녀는 먼저 신앙생활을 잘해,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려야 합니다. 부모의 일관된 기도는 “자녀가 신앙생활을 잘 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성령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힘써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자녀는 현재 간에 돈독한 우애를 지녀야 합니다. 가족들이 서로 이권을 차지하려고 분쟁을 일삼는다면 부모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가 서로 우애를 나누는 모습처럼 아름다운 모습도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모님 앞에서 형제끼리 서로 다투지 말고, 대신 서로 사랑하고 부족한 면을 보태주는 우애를 보이십시오. 이로 인해 부모는 큰 기쁨을 느끼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크리스천 자녀는 열심히 실력을 쌓아 이웃과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됨으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훌륭한 일을 하여 이웃과 사회에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을 때 크게 기뻐합니다.
3. 부모의 노후 생활을 돌보아 드리는 것이 부모공경입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생활을 하는 우리가 입으로만 부모를 공경한다고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노인들은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므로 수입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식으로부터 냉대를 받는다면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겠습니까? 부모의 노후 생활을 돌보지 않고 “복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는 가증스러운 기도요, 이런 기도는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내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행동으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실천적인 모습을 우리의 자녀에게도 물려주어야 합니다.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해진다고 할지라도 부모의 노후대책을 마련해 드리는 일은 기본적 윤리요, 가정마다 전통으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도 각 교단마다 은퇴한 목사님들의 노후대책을 마련해 제정해 놓았습니다.
우리 교단도 부르심을 받아 헌신한 목회자가 21년 이상 목회하다 은퇴하실 때 적절한 노후 대책을 마련하여 기준으로 삼아 규정을 제정해 놓고 있습니다. 퇴직금에 관한 목회자 퇴직금 계산에 관한 규정과, 원로목사 예우에 관한 규정으로 주택은 교회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제공하며, 원로 목사 추대 시에는 퇴직금 외에 월 생활비를 은퇴목사와 교회가 협의하여 지급하며, 목사가 먼저 사망 시에는 생존한 배우자에 관한 생활비 규정을 제정해 놓았습니다. 저의 원로목사 예우에 관하여는 당회 원들과 저와 우리교회 형편을 고려하여 협의하여 원만하게 마련해 놓았습니다. 저는 흡족하고 만족합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봄교회를 개척하여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도록 허락하셨으며, 작지만 예배당을 아름답게 건축하도록 인도하셨고, 나아가서 목회자 세미나를 여러분과 한께 개최하여 금기시하던 치유사역을 한국교회에 보편화 시키는데 죽을 고비를 3번이나 넘겼으나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사용하셨습니다. 7,000 여명의 목회자가 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저의 생을 하나님과, 예봄교회와, 주님의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저는 마지막 소원이 한 가지 있는데 나의 삶을 바친 예봄교회 원로목사가 되어 예봄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교회가 평안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 부흥되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사랑하는 예봄교회 성도들이 저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V.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효성과 불효를 감찰하시고 그에 따라 보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와 부모에게 하는 행동을 보시며, 그에 따라 복도 주시고, 저주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홍수 심판 이후,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누워 자고 있었을 때, 둘째 아들 “함”이 이를 보고 형제인 셈과 야벳에게 고했습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은 노아의 옷을 취해 뒷걸음질 쳐 들어가 그 옷으로 노아의 하체를 덮은 후 다시 나왔습니다. 나중에 술에서 깬 노아가 이 사실을 알고 세 아들에 대해 이렇게 예언을 했습니다. “가나안 함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의 함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의 함은 그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 9:25-27)고 말씀합니다.
부모를 욕되데 한 함은 저주를 받았고, 부모의 수치를 가린 셈과 야벳은 복을 받았습니다.
이 기사는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녀는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가 하면 성경에는 부모를 극진히 모셔 복 받는 여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 기록이 담긴 책이 룻기입니다. 룻은 본래 이방여인인데, 모압 지방에서 엘리멜렉이 죽은 후 그의 아내 나오미가 두 아들을 위해 모압 여인으로 짝을 맺어 주었는데, 여인의 이름은 ‘오르바’ 와 ‘룻’이었습니다. 10 년 후 불행하게도 두 아들마저 죽어 세 여인이 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기로 했습니다. 홀로 넘게 된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하고는 두 자부에게 친정으로 가라고 권유했습니다. 첫째 며느리인『오르바』는 나오미의 곁을 떠났으나, 둘째 며느리인『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라고 말하며,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와 동행하여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룻은 지극한 효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룻은 이방인인, 모압 여인이었으나, 과부인 시어머니를 베들레헴까지 따라와 열심히 봉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게 보셨든지, 복을 내려 주셔서 베들레헴에서 귀한 집의 부인이 되게 하시고,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에 드는 은총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동일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크리스천은 어떤 형편에 처해도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님 공경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할 때, 하나님께서는 실천하는 신앙인, 행함이 있는 신앙인으로 보시고 약속하신 대로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계적으로 진리입니다. 효도하는 사람과 가문이 장수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형통합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지혜로운 가정으로 형통합니다. 공경, 이것은 인격의 뿌리입니다. 공경을 모르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대요리문답』에서 부모란 이런 것이라고 4가지로 말했습니다. 낳아 준 부모, 나를 가르쳐 준 선생 부모, 나를 지켜 주신 왕 부모, 그리고 내 영적인 생활을 지도하는 목사 부모,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4가지 부모 속에 우리는 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순종의 덕을 익히고서야 비로소 인격이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도자가 됩니다. 이것이 가풍이 되고, 가문의 전통이 될 때, 자자손손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축복이 함께 하시는 우리 사랑하는 예봄 교회 교우와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