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5:50-58 ㅣ 김남수 목사]
오늘 보문에 보면 바울사도는 나팔소리가 들리는 것 같이, 승전가의 소리, 승리의 축제가 눈앞에 있는 것 같이 부활의 교리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나팔소리가 나고, 모두가 부활해서 하나님 앞에 들려 올라가는 그런 장면을 지금 사도바울은 멀리서 바라보면서 계시 중에 이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부활의 승리요, 둘째는 부활의 의미입니다.
I. 부활의 승리입니다.
부활은 곧 승리입니다. 그러면 이 승리라는 것은 무엇에서 승리입니까?
먼저는 죄 문제에 대한 승리입니다.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형벌이 따릅니다. 이제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형벌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런데 아시는 바와 같이 오직 부활만이 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부활 사건을 중심해서 그 죄 사함이 구체적이요 실제적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해서 우리 죄를 사하실 때에 전혀 정말로 과거를 기억치 않으십니다. 그런고로 죄 문제,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서만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고 죄 값으로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죄가 모두 사함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김이라는 것은 “사망” 을 이기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은 죄다 합니다. 사망의 이김은 무엇입니까? 사망, 죽음이라는 것, 사람은 한 평생 죽음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계속해서 죽음과 싸워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속에 걱정이 많은 것 같아도 진정한 걱정은 둘 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이고, 하나는 죄 때문에 고민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천당을 믿거나 말거나 분명히 죄 때문에 고민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는 문제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망을 어떻게 이긴다는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죽고 싶다’ 는 말을 잘 합니다. 사람은 죽고 싶은 본능과 살고 싶은 본능이 있는데, 그래서 그저 걸핏하면 우스워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추워 죽겠다 합니다. 외국 사람들도 죽는다는 소리를 많이 합니다. 왜 하느냐? 그것이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해결하고 끝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거 다 죽음과 사람이 친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딘가 모르게 사망의 그늘에서 항상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삐끗하면 죽음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음을 극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도 다 그렇습니다. 이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합니다마는 그러나 해답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 5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된다. - 승리가 이 “사망”을 삼켜버리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이 사망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망을 삼킨다는 것은 부활 외에 다른 말로는 전혀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부활만이 사망을 이기는 것입니다. 부활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 이생뿐 아니라 다음 생으로 연결하면서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 온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내 부활을 믿고, 죽음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승리입니다. 그런고로 부활 신앙만이 사망을 이기는 것이고, 사망을 아주 편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사망에 대해서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사망을 이기는 것은 오직 부활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본문에 보니 50절에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합니다. 썩어진다는 문제, 이 허무함은 롬 8:20절에 보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다 허무하고 무상하다고 합니다. 오직 부활로 인해서 삶의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모든 허무함, 모든 헛된 일로 부터 그것을 극복하고 이기는 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 바로 그 자체에 감추어진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루하루 사는 것이 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버려진 일이 여기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는 아침에 주님 앞에 가서 만날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그리스도의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의 자랑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그 때 가서 만나자 그 때 가서 피차 자랑을 하자, 너희는 나 때문에 예수 믿고, 나는 너희로 인해서 수고가 헛되지 않았으니 참으로 고맙다. 서로 주님 앞에 가서 이야기 하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이야기 입니까? 그리함으로써 오늘의 생활이 전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II. 자, 이제 둘째로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중심이요, 예수님의 부활만이 부활입니다. 다른 것은 다 비사요 비유입니다. 참 부활은 오직 예수님의 사건, 예수님께서 부활한 그것만입니다. 그래서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재림에 관해서 우리의 부활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51절에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합니다. 마지막 나팔에 – 주님 오실 때에 나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공중에서 나팔 소리가 납니다. 옛날에 전쟁을 하고, 전쟁이 끝난 다음 승전가를 부르고, 개선할 때에 나팔 소리가 났습니다. 나팔 소리가 막 울려 퍼지면 모든 시민이 아! 이겼다, 이젠 살았다, 하고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난다 - 이것은 전쟁에서의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뿌리가 될 뿐 아니라, 그는 우리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고, 부활 신앙은 우리의 믿음의 주제가 되는 것이며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 그것이 부활의 근본이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첫째 진리입니다.
그리고 51절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합니다. 창조도 순식간에 되었듯이, 앞으로 부활할 때의 변화도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진화론적인 사고에 대한 정면적인 부정입니다. “순식간에” 변화하리라 하였습니다. 변화라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변화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주일 날 아침에 홀연히 변화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부활과 변화, 같은 말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부활이라는 말보다 변화라는 단어가 더 많이 나옵니다. 오늘도 본문을 보니 변화되리라 생명의 변화, 그리스도의 생명을 원인으로 한 창조적 변화, 이것이 곧 부활입니다. 빌 3:21 에 보면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 변화를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이 변화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 있어질 변화, 그래서 본문에서 “우리도” 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변화하리라 -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상 주님 재림하실 때 부활할 것이라고, 변화하리라 합니다.
그리고 53절에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라” 합니다. “입는다.” 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옷 입는다는 말입니다. 옷을 입는다. - 이 말은 아주 특별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체가 변화되어서 중생하고, 회개하고, 또 달라지고 해서 그리스도의 모습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고 아주 옷을 입혀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예든지 고아든지 좋습니다. 왕이 이 아이 중 하나를 데려 왔습니다. 데려다가 왕이 아들이 없어서 왕자를 삼으려고 합니다. 이 아이가 이제 앞으로 버릇도 좀 나아지고, 공부도 좀 하고, 어느 수준에 다다른 연 후에 …….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를 데려다 놓고 그대로 호적에 올리고, 왕자 옷을 입히는 것입니다. 왕자의 옷을 입히므로 그대로 그 시작부터 당당한 왕자가 되는 것입니다. 입는다는 뜻이 이런 뜻입니다.
입으리라 하였습니다. 죽지 아니함을 옷 입는다 하였습니다. 옷을 입혀 버립니다. 그러므로 전혀 다른 신분의 사람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보니 입는다는 말씀이 많습니다.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옷 입으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입는다는 말씀이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스스로 고쳐서, 변화해서, 교양을 쌓아서, 또 회개하고, 또 이렇게 한 평생 몸부림쳐 보십시오. 이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변화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옷 입힙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흰 옷을 입힙니다. 흰 옷을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므로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말씀합니다. 57, 58절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 신앙에 대해서는 우리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엄청난 이 은혜 앞에 거저 감사합니다. 무조건 감사합니다. 할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면서 항상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58절에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고 합니다. 왜요? 헛되지 않으니까요. 이제 그런 믿음을 가지고 행하는 모든 일, 선한 일이든 봉사든, 교회 봉사든 사회봉사든, 이 모든 하는 일이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 소환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사현선고를 받게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기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유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까? “원수들이 보름스의 기왓장만큼이나 많다할지라도 나는 가리라” “가서 죽는다 해도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서 “하나님이여 나 여기 있습니다.” 하고 기도하면서 재판을 받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5월 17일에「알베르트 귀리」라고 하는 사람은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 주여! 심판하러 오시기 전에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사장들 손에 죽으셨지만, 부활시키어 하늘에 오르게 하셨듯이 당신의 제자 마르틴 루터도 부활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옵소서.” 이 기도문이 남아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 이것이 확실해지고, 이 믿음 안에 살게 되면 거칠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감사하고, 또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