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25-30 ㅣ 김남수 목사]
사려 깊은 바울은 이제 그의 관심을 디모데에게서 에바브로디도에게로 돌립니다. 본문은 에바브로디도를 극적인 사건과 함께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무척 아끼고 존경하는 빌립보 교회는 지금 로마감옥에 갇혀있는 그를 위하여 사랑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마음이 있으면 행동이 따라야 하고, 시간도 서로 맞아야 합니다.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기회를 잘 포착하지 못하면, 결국 사랑하는 마음을 바로 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들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사람 늘 감옥에 들락날락 하는 사람이니까…….’ 하고 그저 기도만으로 끝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최후까지 가능한 한 그를 돕고 싶었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사랑은 말뿐이 아니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을 쓰고 근심하고 기도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을 물질로 섬기려 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 목사 편에 보냅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어떤 집에 감금되어있기 때문에 자유가 없습니다.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가 바울 곁에서 한 겨울을 같이 지내며, 따뜻한 옷과 사식을 넣어 주는 등, 모든 필요한 것을 때맞추어 공급하도록 해 줍니다. 이것은 마음으로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행동도 있고, 희생도 있고, 물질도 표현된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만하지 실천이 없습니다. 생동감이 없는 감상에만 젖어있습니다. 이럴 때야말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내어 최선을 기울이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러한 의미에서 참 훌륭한 교회요,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매우 능동적입니다. 이제 문제는 사랑을 가지고 갈 사람입니다. 아무나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비상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침 에바브로디도는 참으로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릎 쓰고 사도바울을 돕기 위해 갑니다. 빌립보 교회가 아무리 바울을 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해도 그 정성을 전달할 사람이 없다하면 그 사랑은 무효이며,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누군가 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한데 에바브로디도가 자원한 것입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의 행동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지만, 그 사랑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반드시 중간 매개인의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에바브로디도가 로마에 갔습니다. 그런데 로마에는 그 지방 고유의 열병이 있었습니다. 그 곳 주민들은 이미 앓아서 면역이 되었으므로 넉넉히 이길 수 있었지만,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할 풍토병이었습니다. 로마에 간 에바브로디도가 그만 이 열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도바울이 크게 걱정하고 기도하며, 빌립보 교인들도 간절히 기도합니다. 에바브로디도 본인도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삼자가 이 사건을 놓고 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의 병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좀 더 데리고 있으면서 그의 도움을 받고 싶기도 하지만, 빌립보 교인들한테 건강한 그의 모습을 보여주고 하루 속히 걱정을 잊게 해 주려고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25절에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고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는 것이 필요한 일로 생각되어 보낸다하며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편지 중에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개하는 사람도 좋고 소개받는 사람도 좋은 그런 장면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 라고 부릅니다.
거듭난 교회는 서로 형제요, 기본적으로 자매라는 사림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여기에 누가 높고 낮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연령을 보나 신앙연조를 보나 모든 것이 에바브로디도 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에바브로디도를 자신의 형제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요, 에바브로디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 40:4에 의하면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라고 합니다. 낮은 자는 높이고 높은 자는 낮추고, 그래서 수평 되게 만드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는 높은 자나 낮은 자, 귀족이나 가난한 자가 서로 다 형제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아들이 먼저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가 그 아들의 전도를 받아 또 그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하며 대표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데 하루는 아버지가 “나도 한 번 기도해 보자” 하더니 “하나님 형님이여”하더랍니다. 놀란 아들이 기도하면서 웬 형님을 부르냐고 아버지께 묻자 “네가 아버지라고 부르니 나한테는 하나님이 형님뻘이 될 것 아니냐?” 라고 하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모두가 평등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모두가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다 같은 형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향하여 형제라 부르는 그 속에 겸손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도주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둘째, 에바브로디도를 “함께 수고하는 자” 라고 합니다.
이것은 동역자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함께 수고하는 것입니다. 질적으로 똑 같고 기능적으로는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설교를 하고, 어떤 사람은 피아노를 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주일 아침 교회에 나와 기도할 때마다 생각을 합니다. 제가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나 혼자서 하는 것입니까? 주일아침에 자모실에 모여서 함께 기도를 하고, 주일학교 교사가 있고, 찬양인도도 있고, 안내 위원 헌금위원이 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예봄 교회 온 교우가 각각 제 위치에서 봉사도 하고, 예봄교회 온 교우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오늘도 봉사하는 이 많은 분들을 한 사람 한사람 축복하시고 기쁜 마음으로 일하게 하며, 그 수고가 하나님께 기억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모두 동역자들 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가 영국의 메트로폴리탄 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인 중의 한 나이 많은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 할머니는 주일 날 교회에 나올 때마다 언제나 그 날 교회에 등록한 초신자 명단을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의 신앙을 위하여, 또 모든 시험을 이기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그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평생 기도했습니다. 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스펄전 목사는 장례식을 인도하면서 “그는 나의 가장 훌륭한 동역자였습니다. 교역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큰 동역입니다. 새로 믿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 하는 것도 위대한 동역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사람보기에는 작은 일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지 우리는 모릅니다. 가장 귀한 것은 이런 영적인 일들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목원이 교회에 나와 그 목장의 교인들을 위해 어려운 문제를 당한 교인의 이름을 부르며 차례차례 기도하는 일이야말로 목회자의 큰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함께 군사된 자” 라 합니다.
군사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생명을 바쳐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군사는 사사로운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군인은 오직 나라를 위하는 충성 한 가지만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군인은 죽도록 충성하고, 상은 대장이 받습니다. 바로이것이 군인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모시고, 함께 수고하는 군사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우는 군사들인 것입니다. 사실 군대에서, 특히 생사가 달려 있는 큰 위기 속에서 사귄 친구야말로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예봄 교우들은 저와 함께 그간 어려움을 이겨 온 전우들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넷째, “나의 쓸 것을 돕는 자” 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감옥까지 가지고 가서 바울의 필요한 것을 필요한 시간에 조달받을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감옥에 갇힌 사람한테 무슨 많은 돈이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행을 다니기 위해 자동차를 사겠습니까? 빌립보 교인들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위하여 돈을 모을 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로 하여금 그 헌금을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구해서 바울에게 넣어주게 한 것입니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를테면 병원에 입원한 환자에게 좋은 음식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는 사람마다 먹을 것만 잔뜩 사가지고 오니 어느 환자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건강해서 잘 먹을 때는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더니, 아니 병들어 먹지도 못하는 마당에 무얼 그리 많이 사 기자고 오는지 …….”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때에 그 장소에서 그 시간에 꼭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할 때도 무엇인가, 어떻게 위로하고 어떻게 사랑해야하는가, 또 무엇을 주어야 하고 무엇을 거절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랑하는 마음에 지혜가 부족하여 그 필요에 바로 부응하지 못할 때, 그것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 때문에 상대방을 괴롭히는 경우가 될 때도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바로 이러한 행동, 이러한 지혜가 사랑의 귀한 열매입니다.
다섯 째,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30절)” 고 했습니다.
그가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고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자랑합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대목입니다. 만일 에바브로디도도 자신이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했다”고 말했다면, 이것은 대단한 말이 못됩니다. 제 3자인 사도바울이 “저 사람은 죽기에 이르러도 그리스도와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했다”고 높이 평가한 것을 우리는 생각나야 합니다. 여기에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했다고 하는 헬라어는 재미있고 유익한 배경이 있기에 잠간 소개할까 합니다. 이것은 “파라볼류에스다이(παραβολευεσθαι)”라고 하는데, 바로 이 말은 “곁으로 던지다”는 뜻입니다-이것이 바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결국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입니다. 자기 생명을 전부 예수님께 걸어버렸습니다. 저도 죽을 고비를 3 번이나 넘겼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넘어선 큰 모험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사람을 소중히 여기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교회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고, 어떤 굴욕을 당해도 좋다고, 복음, 교회를 위해서라면 이 시간에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으로 에바브로디도를 높이 평가하고 추천합니다.
본문 26, 17절에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로 돌아가서 극적인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에바브로디도가 지금 병들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모두가 기도하는 장면을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바울로서는 그 젊은 목사가 자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병들어 죽는다면 그 얼마나 죄송한 일입니까? 바울한테는 물론이려니와 빌립보 교인들한테도 미안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물론 순교할 수도 있지만, 바울을 위해 왔다가 병들어 죽는다면, 이 사실이 바울에게는 굉장히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 그가 이 일로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 교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나 괴로울까, 여기까지 와서 바울에게 큰 짐을 주니 얼마나 괴로울까,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또 에바브로디도 편에서 볼 때에는 자기 죽는 것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아무 때 죽든지 복음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가 죽는다면 절반은 순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은 상관이 없는데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바울 선생이 얼마나 괴로울까, 빌립보 교인들한테도 신앙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이런 것이 걱정이 됩니다. 복음을 위해 일하다가 열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들릴 때, 믿음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딴 소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죽는 것을 개의치 않고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위해 괴로워합니다.
또 교회의 입장에서는 바울을 편하게 하기 위해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는데 그가 거기서 죽는다면 혹 떼 주러 갔다가 혹 붙여주는 격이요, 오히려 바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3자가 서로 자기 걱정은 하지 않고, 상대방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만을 걱정합니다. 이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삼자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어여삐 여기셨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더 하시어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본문 28, 29절에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제 너무도 고맙고 기뻐서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바지를 샀는데, 너무 길어서 부인한테 한 치만 줄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어린아이 젖을 먹이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이것을 보고 그 바지를 가져다가 한 치를 줄이고는 슬그머니 돌려놓았습니다. 잠시 후, 시누이가 보니까 아이고 언니가 바지는 줄이지 않고 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져다가 또 한 치를 줄여 놓았습니다. 마침내 며느리가 잠에서 깼습니다. 하마터면 바지 줄이는 것을 잊을 뻔했다고, 바지를 또 한 치 줄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이 그 바지를 입어보니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이 짧은 바지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각 각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염려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30절에서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빌립보에서 로마감옥 까지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있습니다. 이것을 에바브로디도가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소 희생하고 수고하는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 위해서는 자기 일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 자기 죽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걱정할 줄 아는 이런 덕 있는 사람, 바울은 이런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높은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