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19-24 ㅣ 김남수 목사]
바울은 자신의 순교의 암시까지 보이면서 고조된 권면은 일단 중지하고, 냉정한 교회문제로 돌아옵니다. 여기서는 가까운 장래문제를 발표합니다. 그것은 디모데를 보내는 것과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는 곧 있을 재판의 결과를 보아서 디모데를 보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21절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라고 합니다. 본문 중에는 디모데가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로 소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디모데가 성경에 자주 많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는 디모데와 사도 바울과의 관계, 그리고 디모데라는 사람의 하나님의 종 됨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데, 밖에서 되는 일들이 궁금했습니다. 예를 들면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으면, 몸은 불편하지만 밖에서 되는 일들이 궁금합니다. 특별히 바울 사도도 자신이 복음을 전해 준 빌립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잘 성장하고 있는지, 어떤 형편에 있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이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고 소식을 들어야 평안한 마음,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무던히도 사랑합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바울을 사랑해서 그에게 소식을 전하고 위로금을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교회의 목사를 보내어 사도바울을 돕도록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목사인 에바브로디도가 로마감옥에 머물러있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는 현재 교역자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 교회가 어떤 형편에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궁금하여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디모데를 보냅니다. 그 교회의 사정을 알고 싶은 마음에서 보내고, 좋은 소식을 들어 마음에 위로가 되고자 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추천한 디모데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그의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요, 어머니와 외조모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종교적으로 히브리 전통을 따라, 히브리 사람이 되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신앙이 모계를 따라갑니다. 부모가 둘 다 히브리인일 경우 자녀는 물론 히브리인이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 남자가 이방여자와 결혼할 때,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방인입니다. 또 히브리 여자가 이방남자와 결혼 할 때,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히브리사람입니다. 이처럼 종교문제에 대해서 히브리인은 모계를 따르는 것입니다.
디모데도 이방나라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히브리 교육 덕분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됩니다. 디모데에 관한 것을 조화 있게 설명하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혈통으로 얻은 철학과, 어머니 혈통에서 온 히브리 종교, 이 두 교육이 합쳐져서 그를 이상적인 선교사로 만들어 놓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디모데를 만납니다. 이때에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가 되고 동역자가 됩니다. 바울은 그를 ‘믿음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속에 있는 신앙이 사도바울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내가 너를 낳았다’ 할 만큼, 디모데는 바울적인 그리스도인이요, 바울과 함께하는 동역자입니다. ‘아들’ 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전 4: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라고 합니다. 선생은 얼마든지 많지만,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철저하게 아버지를 닮고, 그 아버지를 따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편지 가운데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도여행 때 디모데는 바울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동행했고,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는 물론 심지어 로마 감옥까지 동행했습니다. 결국 동행한다는 것은 아들 됨을 의미합니다. 아버지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아들 노릇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해서, 멀리 있는 아들은 아들이 아닙니다. 요즘 자녀들이 멀리 가버려서 부모가 돌아가셨다 해도 오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눈에서 멀리 떨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가 부득이하여 외국에 나가 살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부모 공경하는 아들은 멀리 여행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어야 아들입니다. 우리가 효도를 하려면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는 용도만 조금 부쳐드리면 효도 다한 듯 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디모데는 사도바울의 전도여행에서 상당 부분을 함께 다녔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전세방에 감금됐을 때, 디모데는 그 셋집에 가서 함께 불편한 생활을 하며 그를 도왔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의 대필가도 되어 주었습니다. 바울은 눈이 안 좋아서 손수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 중 적어도 다섯 편 이상은 디모데가 대필을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 고린도 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등을 디모데가 대필한 것입니다. 바울이 불러주면, 디모데가 받아씁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훌륭한 비서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3:23 을 보면 그는 사도바울을 따라 다닌 것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적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사도바울이 이 디모데를 바울 대신 보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함께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일거리를 맡겨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성격이 강인하지 못하여 위장병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개 성격이 좀 꼼꼼하고, 예민한 사람한테 위장병 증세가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한테도 이런 면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디모데는 바울과 성격도 조화가 잘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뜻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서로 친하려면 성격이고 뭐고 다 똑 같아야 좋은 줄 알지만, 실은 다르기 때문에 친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자와 여자는 다르기 때문에 같이 살 수 있습니다. 성격이 꼭 같아야만 된다는 생각은 소아병적인 생각입니다. 취미가 다르고 생활과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는 적극적이요 , 하나는 소극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훌륭한 조화가 됩니다. 더욱 하나 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타협 없는 일치야 말로 가장 귀중한 조화를 이룹니다. 우리는 서로 타협하고 양보하고 중간 지점에서 만나야 되는 줄 알기 쉽지만, 그것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하나 됨이란 전혀 타협이 없는 가운데서 하나가 되는 그런 조화 있는 일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하나 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성격을 보면 거의 정 반대입니다. 오히려 그래서 두 사람은 잘 조화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추진력이 있고, 디모데는 사고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정열적인 사람입니다. 잘못된 점을 보면 베드로까지도 면전에서 신랄하게 몰아붙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한테 그런 정열이 있는가 하면, 디모데한테는 자제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주도적 인물이요, 디모데는 협조적 인물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좋은 동반자이자 협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를 자기 대신 대사 격으로 간단히 추천하면서 빌립보 교회에 보내고 있습니다. 대신 보내는 사람이나 보냄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훌륭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믿고, 여러분 대신 어디에 보내는 적이 있습니까? 혹은 누구의 추천을 받아 보았습니까? 당신이라면 틀림없으니 내 대신 가 봐달라는 부탁을 받아 보았습니까? 이것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대행자가 되려면 몇 가지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뜻을 같이해야 합니다.
목적, 사고방식, 신학방식이 같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어느 복음주의자가 대신 누구를 보내야 할 경우, 그 누구란 적어도 같은 복음주의 자이어야지, 자유주의자일 수는 없습니다. 신학방법, 방향 그 중심이 같아야 합니다.
둘째, 상황판단이 정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냉정함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감정에 치우치는 사람은 보내지 못합니다. 가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좀 냉정하고 객관성을 지닌 사람, 자기 주관이나 편견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라야 추천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좋은 뜻을 주어서 보냈는데, 그 곳에 가서 자기 본분을 잃고 현지인에게 동화되어 빠져 버린다거나, 지엽적인 문제로 좋다 나쁘다 하다가 일을 망쳐 버린다거나, -이렇게 감정주의적인 사람은 도저히 추천할 수 없습니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통찰력을 가진 사람만이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변덕이 없는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믿는다고 할 때,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는 그 사람 자체를 믿는 것이고, 다음은 그 사람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과 능력을 다 함께 믿을 수 있을 때에라야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 사람과 능력을 다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틀림없는데, 재주가 없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내 남편은 믿으나 운전 솜씨가 엉망이면 그 차는 못 탑니다. 이와 같이 남을 믿고 파송하려면 , 그 사람의 진실은 물론 그 사람의 판단력과 능력까지 다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이기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보냄 받는 사람이 자기를 위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1)”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2:22).” 고 말씀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자기 욕심- 자기 명예, 자기 소득을 위하는 객관적인 욕망을 뚝 떼어버려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자 세미나를 하는데 제 개인적인 강사료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기도해 주고도 돈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특강 강사비는 꼭꼭 정확하게 챙겨드립니다. 이번 세미나도 오히려 재정적으로 손해 보고 있습니다. 저는 30 여 년간 세미나를 인도했지만 강사료를 한 번 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무보수로 일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인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자기 이권이나, 자기생각에 빠져 있었다면, 하나님의 일을 올바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넷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이 사랑은 존경을 겸하는 사랑입니다. 안타까워하며 사람을 세우는 사랑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함과 같이, 보냄을 받는 사람은 보내는 사람을 아버지인양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아버지 이름으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하면서 아버지 이름보다 내 이름을 내고 싶어집니다. 또 “내가 왜 아버지 이름으로 일을 하느냐, 왜 바울의 이름으로 일을 하느냐, 디모데의 이름으로 일을 해야지”- 이런 생각이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냄을 받는 자는 언제나 보내는 자를 아버지인양 종경하고 사랑하고 그 이름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 22절에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의 수고에 대하여 칭찬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친 아버지의 말씀에 사랑의 마음으로 졸대 순종하는 아들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의 자세를 잃지 않는 금과 같이 연단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의 복음을 위한 수고는 자신을 낮추고 돕는 자로서 한 수고였습니다.
사람을 알아보려면, 두 가지를 시험해 보면 된다고 합니다. 첫째, 돈을 어떻게 쓰는가를 살펴보는 것이요, 둘째는 칭찬을 해서 겸손한지 교만한지 그 반응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어보니까 디모데는 역시 훌륭합니다. 십여 년 동안 함께 지내보니, 훌륭한 사람인고로 안심하고 그를 보내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께 충성을 다 하겠다.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하고 맹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일을 주시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치겠다. 맹세하고, 자기 것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하나님, 과거에는 이러 저러했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기도하니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어떻게 신용하시겠습니까? 이처럼 진실이란 하루아침의 맹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동안 경험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진실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것은 디모데와 같은 동역자입니다. 지도자도 좋지만, 협력자가 더욱 필요합니다. 마치 디모데가 바울에게 평생 협력한 것처럼, 그 뒤에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동반자, 그런 협력자가 아쉽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를 추천한 것처럼 안심하고 마음 놓고 추천할 수 있는 그런 일꾼들이 되도록 우리가 힘써야 할 것입니다.
본문 23,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디모데에 관하여 이만큼 소개하고 나서, 사도는 디모데를 보내겠다고 19절의 생각으로 되돌아갑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일단 판결이 확정되면, 멀리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사랑하는 디모데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 소식을 전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판결에 유죄선고가 될 것인지, 아니면 무죄선고가 내려져 풀려나게 될 것인지, 바울은 확실히 알지는 못했으나 그것이 후자일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습니다. 어떻게 되든 그는 주님을 신뢰함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려 할 뿐 아니라, 자신도 그들에게 속히 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건강하게 잘 성장하고, 서로 사랑하며 어떤 형편에 있는지 궁금하여 가서 보고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마음, 소식을 알아야 편안한 마음, 이것이 목자와 양과의 관계요 사랑인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