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1:3-8 ㅣ 김남수 목사]
일반적으로 바울 당시의 편지의 순서는 서두에 이름을 밝히고, 그 다음 감사와 기도가 있고, 이어 편지의 내용이 뒤따릅니다.
바울은 인사에 이어 본론을 말하기 전에 감사와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서신의 통례입니다.
본 서신도 그 당시의 편지의 형식을 따른 것입니다.
바울은 각양각색의 모든 교회를 대할 때마다 거기에서 감사할 것을 발견했고, 또한 위하여 기도해야 할 점을 파악했습니다.
누구를 위하든 우리도 감사와 기도가 겸해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양분되어 3-8절까지는 감사와 9-11절까지는 기도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감사의 말씀을 상고함으로써, 먼저 바울은 과거를 되돌아보아 빌립보 교회가 복음전파에 참여함에 감사하고, 그들이 신앙의 유종의 미를 거두리란 바울의 신념을 피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조는 깊은 기도와 간곡한 자애가 흐르고 있습니다.
3절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복음전파에 동역자가 되어 그들이 베푼 사랑의 행위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랑을 받고도 생각할 때마다 원망합니다.
4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신앙이 잘못된 사람은 기도할 때마다 감사는 커녕 먼저 원망과 불평이 튀어나옵니다.
이러한 사람도 성령 받고 회개하여 신앙이 바로 서면 좋은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하게 됩니다.
원래 기쁨과 감사는 그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함께 감사한다는 것은, 곧 기도와 함께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기도할 때 마음이 깨끗해지고 감사가 자리 잡게 되면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4절에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본 서신에는 기쁨이라는 천국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우리도 앞으로 본 서신을 상고해가면서 천국적인 분위기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항상 기쁨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기도 중에서도 가장 능력 있는 기도가 기쁨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몸소 체험했습니다.빌립보 감옥에서 매맞고 쇠사슬에 묶여 갇혀 있었으나, 기쁨으로 감사하고, 찬송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절히 기도했을 때에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이 기적의 체험을 빌립보 교인들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인들은 기쁨으로 간구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항상 기쁨으로 간구할 때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집 벽에 걸린 살전 5:16-18 말씀은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것이 분명하게 아울러져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기뻐하기를 바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는 이의 마음은 받는 쪽에서 언제나 기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기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사와 기쁨의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 감사한다하면서 무엇이 감사한지, 구체적인 내용이 없으면 안 됩니다.
기뻐한다면서 무엇이 기쁜지 말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해 놓고는 금방 그저 달라는 불평불만뿐입니다.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합니다.
무엇이 감사한지, 무엇이 기쁨인지,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지금 “너희를 위하여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다.”고 구체적으로 감사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며, 감사했던 것은 그들의 신앙과 교제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환난과 핍박 중에도 신앙을 잘 지켜나가며, 자신에게 위로금까지 보낸 성도의 교제를 생각할 때, 신령한 기쁨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올랐던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처음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그 시간부터 빌립보 교회는 계속 복음 안에서 믿음, 소망, 사랑으로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성령으로 충만하고, 또한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 복음 안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바울은 지금 자신은 감옥에 있지만, 이를 보고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기쁨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교인들이 잘될 때 성공할 때, 이를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마음-성도의 믿음과 성장과 교제를 보고 기뻐하는 마음은 은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라고 한 것은 나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마다 끊임없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생각해도 억울하고, 저 사람을 생각해도 분이 터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소멸되어 은혜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5절에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바울은 복음 안에서 성도의 교제(참여)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영적 교제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원한 교제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어준 교제입니다.이 세상 사람들이 모이는 교제는 돈이나 명예나 이권 때문에 맺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그 동기가 아주 순수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교제는 그 동기가 순수하지 못합니다.이래저래 불순한 조건이나 동기가 숨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교제입니다.이 교제를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분이 이루실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즉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형제, 친척보다 성도의 교제가 가장 깊고 영원한 것이요 순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만나는 것이 꺼림칙하고 거북한 사람은 ‘자신이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을 만나도 반갑고, 저 사람을 만나도 반갑고,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이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을 하고 보니, 자기를 진정으로 생각하며 찾아와 기도해 준 친구는 교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성도의 교제를 귀하게 여기고 잘 맺어지도록 힘쓰십시오.잔치 집에도 가고, 상가에도 가고, 열심히 사귀어 두십시오.
장례식 때 보면 그 덕이 나타납니다.
성도의 교제가 시원치 않은 사람은 죽어도 아무도 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임종 때나 장례식 때 보십시오.
진정 그 가정을 위로하고, 기뻐해 주는 사람은 성도 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위로만큼 따뜻하고 힘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을 치른 후 고인의 가족들이 믿든 안 믿든 모두 함께 교회 나와 감사하고, 새롭게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하여 외롭고 고통스럽습니까?
이 세상에서 나 혼자라고 생각하면서 혼자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외로워하지 마십시오.다른 이유 하나도 없어도, 우리가 한 교인의 교인이라는 것,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모두 찾아옵니다.
또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도는 외롭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많고, 눈물로 위로해 줄 사람도 많습니다.세상 사람이 다 외면해도 성도의 교제는 언제까지나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 동기가 그리스도요, 주 재림을 기다리면서 주의 능력 가운데에 이 교제가 계속 이어져가기 때문입니다.
6절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을 인하여 감사와 궁국적 이유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착한 일은 은혜였으며, 그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착한 일은, 빌립보 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마귀의 권세에서 놓여나게 하사, 영생을 얻게 하니 은혜이며, 그것으로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작하신 착한 일은 빌립보 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마귀의 권세에서 놓여나게 하사, 영생을 얻게 하신 은혜이며, 그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 죄 사함 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변화되어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기어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영생 복락을 누리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이단 사설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날뛰고 청와대까지 들어갔으며, 기성교회를 부정하고 그 곳에는 구원이 없으며, 자기들만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자칭 재림 예수까지 나타나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한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착한 일 즉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부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하십니다. 도중에 갑자기 중지해서 인간 왕국을 따라 세우는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으며,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며, 그리스도인을 돕고자 와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환영하여 모셔 들이고 의지하는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가지는 확신은
7절상에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대하여 가지는 확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사도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교인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빌립보 교인들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으며 그 마음속으로부터 그들에 대한 생각과 사랑의 감정이 솟아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빌립보 교인들을 마음속에 품고 항상 기억하며 위해서 기도해주고 바르게 행하도록 훈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과의 올바른 관계인 것입니다.
7절하에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그리스도인이란 복음을 전하고 변명하며 확정할 뿐만 아니라, 이일을 귀하게 여기고 동참 곧 참여하는 것입니다.
지금 본 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변명하는 일과 확정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변명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아폴로기아(άπολογία)인데 이 말은 이미 결론이 난 것을 가지고 세상철학이나 이방종교에 대하여 반박하면서 복음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아주 유식한 논리적인 변증가였습니다.
변명 외에 확정한다는 뜻은 헬라어로 베바이오시스(βεβαίωσις)인데 이것은 흔들리지 않고 튼튼하게 서도록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확증은 믿고 있는 사람을 똑바로 확실하게 믿도록 흔들리지 않도록 격려하고 세우는 것입니다.
또 지금 바울이 “너희가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참여자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합니까?
참여자란 요즘 말로하면 복음의 동반자 협력자란 뜻입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분담하는 동반자를 뜻합니다.
나가서 전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뒤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김남영 권사님은 매일 새벽에, 수요기도 때, 금요기도 때에 나와서 교회를 위하여 구역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동반자로 할 일입니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해외에 나가서 선교하지 못해도 뒤에서 나가 선교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자체가 복음의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장에서 목장이 책임 맡은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합시다.우
리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 목장에서 기도로 돕고, 물질로 돕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족을 목장에서, 새 가족 부에서, 주일학교에서, 돌보는 일이 복음의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목회서신을 보면, 복음전하는 자로 하여금 아주 기분 좋게 펴안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우리는 뒤에서 도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자를 위하여 돕는 것이 또한 전도입니다.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씨앗을 심는 자가 있고, 물주고, 가꾸는 자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일보다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교역자를 돕고 싶습니까?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큰 도움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협력으로 제가 지금 살아있고, 치유사역도 보편화 시킬 수 있었습니다.
기도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8절을 봅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사모한다는 말은 그리워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모하는고? 하니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장은 헬라어로 스프랑크논(σπλάγχνον)인데 가슴부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심장, 간장, 폐장을 포함한 가슴 전체를 가리킵니다.헬라인들은 가슴에 감정이 있고, 정열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뜨거운 정열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지금까지 입증한 모든 말이 이해관계가 있어서 하는 인간적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뜨거운 순수한 신앙의 사랑임을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마음에 품고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그들을 다시 보기를 열망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사랑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랑이었으며, 또한 그 사랑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사랑은 거짓이 없고, 순수한 정열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증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보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