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5:1-12 | 김남수 목사]
사도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의 세월을 보내고, 새 총독 베스도가 부임한 후에도 유대인의 악심은 변하지 않았으며,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소환하여 재판할 것을 베스도에게 청원하였습니다. 베스도는 재판을 개정하고 유대인의 청원에 대한 바울의 의사를 물었는데 그는 단호히 로마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습니다. 본장의 내용은, 먼저 1-5절까지는 신임총독 베스도가 바울을 인수한 내용이고, 다음 6-12절까지는 재판석에서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한 내용입니다.
I.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 인계된 바울(1-5절)
1절에“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베스도가 새로이 가이사랴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베스도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별로 아는 바가 없지마는 역사가들의 간단한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는 악하고 정치적으로 욕망이 많고 간사한 사람이었으며 뇌물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정직하고 의롭고 아주 곧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가 유화정책으로 온건파에 속하고 지혜가 있는 베스도를 새 총독으로 가이사랴에 보냈을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부임한지 2년 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므로 그는 2년 밖에 총독 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그는 유약했지만, 정직하고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본 절에 보는 대로 그는 부임한지 바로 3일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이야기이지요. 또한 총독은 언제나 군사와 함께 다니는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를 다스리는 총독이 마음 놓고 함부로 다닐 수는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암살할지 모르는 곳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어디든 함부로 행차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임한 지 사흘 후에 군사도 수행하지 않은 채 스스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와서는 유대인의 최고회의인 산헤드린 공의회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만났습니다. 2절에“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 새” 베스도는 지금 아주 악화된 로마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개선하여 우호관계로 이끌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총독은 유대 지도자들의 소원을, 적어도 첫 소원은 들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이런 복선이 깔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첫 번째로 내놓은 요구인 즉,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재판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3절에“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이렇게 요구한 것은 재판하려는 게 아니라,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데리고 오는 도중에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죽여 버리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를 죽이고자 한 것이 벌써 2년 전 얘기입니다. 그 쯤 됐으면 잊어버릴 만도 한데, 아직도 원한을 품고 바울을 죽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참 지독히 악한 사람들입니다. 베스도 총독이 예루살렘에 와서 처음으로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좋은 관계를 세우려고 하는 그 때에, 바울의 일을 첫 번째로 내 놓은 것입니다. 이 기회, 즉 베스도의 호의를 악으로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을 암살하려는 계획인 것입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지혜로웠습니다. 벌써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아니다. 필요하면 내가 가이사랴에서 다시 재판을 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와서 고소하기를 바란다.(5절)”하고 처사합니다. 대단한 지혜라 하겠습니다.
II. 가이사에게 상소한 바울(6-12절)
베스도가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재판하는 장면이 7절과 8절에 나타납니다.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여기에 보면, 베스도가 8일 후에 저들이 있는 가운데 재판을 엽니다.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이래서 죄인입니다. 저래서 죄인입니다. 하고 송사했지만, 저들이 아무리 말해보았자 죄다운 죄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다 할 증거를 댈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재판의 결론은 바울이 말한 대로“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저들은 바울의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중요한 대목이 여기에 있습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저들에게 마음이 돌아간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재판하는 사람이라면, 오직 이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유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저들에게 신경을 써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못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죄인이냐 의인이냐, 죄가 있느냐 없느냐, 이 사실만 생각해야 되는데, “이 사람을 재판하면 내가 어떻게 되느냐, 자기 지위가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뭐라고 할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벌써 구부러지는 것입니다. 재판하는 사람은 오로지 이 사람이 의인이냐 아니냐, 죄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9절에“유대인이 마음을 얻고자 하여”- 그 마음을 얻어서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자기의 위치를 확고히 지키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치적 욕망이나 정치적 수단,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서 “이 일이 정말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 정말로 진리를 위함이냐”-이것만이 우리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상황을 보면서 이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 앞에서는 도저히 정의를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11절에“내가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난 예루살렘에 안가겠소, 뿐만 아니라 여기서도 재판받지 않겠소, 로마로 가겠소, 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요. 그 곳에서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소’하는 것입니다(10절). 어떻든 저들이 없는 로마에 가서 재판 받을 생각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로마 가이사 황제에게 호소하게 됩니다.
11절에 심각한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아주 담대하고 똑바른 태도입니다. 내가 옳으냐 그르냐? 내가 죄인이냐 아니냐? 이것만 판단하시오. 만일 내가 죄가 있다면 나를 저들에게 내어줄 수 없소. 누구도 그럴 수 없소. -이것은 법위에 양심이 있고, 양심 위에 하나님의 뜻이 계심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죄인이면 죽어야 하겠으나, 만약 죄가 없다면 누구도 나를 저들에게 내어 줄 수 없다’라고 담대하게 말씀합니다.
「헨리 피쳐」라고 하는 목사님이 인디애나폴리스의 어느 교회에 새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아하니 그 마을 사람들의 윤리 의식과 생활이 아주 엉망인 것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그저 시간만 있으면 술과 도박을 즐깁니다. 도박에 찌들었습니다. 목사님은 바로 엄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 전부가 아예 술도 안 되고, 도박도 안 됩니다. 이것들은 다 죄악입니다.”하며 술과 도박의 죄악성을 시간시간 설교했습니다. 교인들은 아주 감동이 되어 술도 도박도 끊고 정결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차츰 달라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설교하고 있는데 술집 주인이 들어와 총을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로 마을 사람들이 달라지고 자연히 술을 못 팔아먹으니까 교인들 앞에서 목사님을 협박합니다. “설교를 고쳐라, 술이 왜 나쁘고, 도박이 왜 나쁘냐? 계속 이렇게 설교하면 죽여 버리겠다.” 그 때에 피쳐 목사는 서슴지 않고“나를 쏘시오”하고 태연하게 나섰습니다. 결국 술집 주인은 총을 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 일로 인해서 그 교회와 그 마을이 완전히 새로워졌다고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맡긴 용기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바울은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저들에게 내어 줄 수 없다, 나는 로마황제에게 상소하리라.
바울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암살하려고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이동될 때 도중에 매복했다가 그를 죽여 버리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베스도 총독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암살당하는 것은 순교성이 희박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시겠지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암살당하는 따위의 순교를 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보세요.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러 번 죽을 뻔했지만, 그 때마다 예수님은 피하셨습니다. 왜 비겁하게 피하셨느냐 하겠지만, 그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암살당해서 만민의 구주가 될 수는 없어요.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죽으셔야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눅9장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굳게 결심하신 예수님께서는 벌써 십자가가 앞에 있는 것을 다 아시고 이를 여러 번 예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골고다 언덕까지 가십니다. 다 알고 가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몰라서, 어쩌다가 그만 죽는 길은 순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자신이 무능하여 피하고 피하다가 이제 더는 피할 수 없어서, 도피하지 못해서 죽었다면 그것도 순교가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이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죽어야 순교입니다. 순교하는 그 시간에“아이고 내 팔자야”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순교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또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스데반처럼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순교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피하지 못해서 불가피하게 죽는 것은 순교라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시간의 문제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참 엄숙한 것이 아닙니까? 내 죽음의 장소와 시간과 장면이 아주 엄숙한 하나의 작품이 되어야만 합니다.
한 성직자가 죽었어요. 그런데 어디서 죽었는고 하니, 하필이면 창녀의 집에서 이었어요. 그래 가지고「TIME」지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죽은 장소도 제대로 택하여 죽어야지요. 시간, 장소,……. 다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곧 양을 잡는 날을 택했습니다. 유월절은 이제 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죽는 시간입니다. 장소는 예루살렘, 그리고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골고다 언덕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만민을 대신해서 장엄하게 제물로 바쳐진 것입니다.
이제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여러 번 죽을 뻔 했었는데, 이제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하던 중에 로마를 선택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로마에서 죽으려고 합니다. 나중에 정말로 그는 로마에서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다 우리가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계속 기도할 제목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이러한 죽음을 죽게 하소서”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는 여러분이 알아서 기도하십시오. 분명히 죽을 것인데, 어떤 모양으로 죽어야 하겠습니까? 일일이 제가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제 설명대로 못 죽는 사람은 다 잘못 죽는 것 같이 되니까 말입니다. 아무튼 바르게 죽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의 순교지를 로마로 선택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모순된 현실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길이 평안하게 열린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인 사람들의 혼탁성, 거짓 종교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위선,…….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오직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저 기회가 주어진 대로, 감옥에 있으면 감옥에서, 개인을 만나면 개인에게, 법정에 서면 법정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의 우리처럼 방송으로 전하고, 강단에서 전하고, 광장에서 전하고,……. 이렇게 열려진 것이 아닙니다. 심한 악조건 속에서 줄기차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로마에 가겠다고 합니다.
아마도 행 23장 11절 말씀을 마음에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네가 예루살렘에서 증거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거하리라. 걱정 말아라. 너는 로마에 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가는지는 몰랐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자유롭게 가기를 바랐지요. 그러나 그 길은 2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는 이제 모든 자기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택합니다. 바로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는 것입니다. 자유인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쇠고랑을 차고 로마로 가는, 미지의 불확실한 길을 택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계시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결단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전도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오묘한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궁극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고, 선교에 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을 우리는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방법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는 이 모순된 현실을 통하여 뜻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