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37-22:11 | 김남수 목사]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이 예배를 마치자 체포되었습니다. 바울이 반유대적이라는 것과 반율법적이라는 것, 성전을 더럽혔다는 죄목이었지요. 그러나 사실은 이 때문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 때문에 바울을 죽이려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던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을 죽이려 한 것은 동족인 유대인이요, 바울을 죽지 않도록 체포한 것은 이방인인 로마군인입니다.
오늘의 내용은 이러한 지난 주일의 내용에 이어 바울이 성난 군중 앞에서 천부장의 보호 아래 자기변명을 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나아가 전도 설교로서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전도를 하려 한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 섰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 한 몸 보존하려는 것이 일반 사람의 마음이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치 않았습니다.
성난 군중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영문도 모르고 휩쓸려 있는 사람들임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로 진실을 알게 해서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돌을 던지려 하고, 찢어 죽이려 대들어도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는 마음입니다. 사실 자신들이 잘못된 것을 몰라서 그렇지 다 알고야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저들을 향해 담대한 마음으로 일장 연설을 하게 됩니다.
본문 21장 끝부분을 보십시오. 천부장은 로마 군인으로서 오로지 정치적 관심 밖에는 없는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헬라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당신이 애굽 사람이냐?(38절)" 라고 묻습니다. 일전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반로마 혁명을 일으켰다가 일당은 다 체포되고 주동자인 애굽 사람은 광야로 도망친 일이 있었는데, 체포 못한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니요, 나는 유대인입니다.." 하고 자기 정체를 분명히 말합니다. 쓸데없는 오해와 누명으로 인해 천하게 처형될 필요는 없기에 밝히 변명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바울은 히브리어로 말합니다. 그 태도는 벌벌 떨며 자기 생명 본존하려고 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오히려 구원하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어떤 형편, 처지에서든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사도바울은 아주 담대합니다.
바울의 전도 자세는 3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말씀했습니다.
전도는 그렇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 때가 마지막 기회일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에게 전도할 때 이게 마지막 기회다, 다시는 저 사람을 못 만날 수도 있다, 다시 전도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예배드릴 때도 다음 시간에 또 나올 수 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간이 마지막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그 옛날 이렇게 설교한 다음 스데반이 돌로 쳐 죽임을 당했듯이 자신도 당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서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릇 언제나 그런 마음으로 임해야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 가장 중요한 말, 그야말로 기본적인 복음, 꼭 전해야할 말만 하세요. 긴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몇 백번 말했든 간에 꼭 알아 두어야 할 그러한 말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렇게 전한 다음에 되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을 다 들었습니다. 이제 그 다음에 되어지는 일은 내가 책임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게 어떤 결과가 와도, 돌에 맞으면 맞고,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이 시간만은 내가 할 일을 다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마가복음 성경을 번역하여 만들어서 대동강을 통해 들어오려 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한국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불덩이를 던지는 바람에 배는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 앞에서도 토마스 선교사는 성경책을 계속해서 강물에 던졌습니다. 자신은 죽지만 성경책은 한국 땅을 밟게 하려던 것이지요. 이 성경을 주어다 읽을 사람들이 있었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대로 돌을 맞아 죽어도 좋소,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을 들으시고, 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변명하는 내용을 자세히 보세요. '사실'을 말하고 있지, 결코 추상적인 이론이나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가 만난 사건, 그 경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이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전도인이 전도 받는 이와 똑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다른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당신과 나는 똑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 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3절에 "나는 유대인으로" 라는 말처럼 당신들과 똑같은 히브리 사람이요, 동질의 문화권임을 먼저 상기시킵니다. "나도 믿기 전에는 당신들과 똑같았소, 믿는 것만 빼놓고는 당신들과 똑 같은 사람이요, 오히려 당신들보다 더 극성스러운 히브리인이었소." 라고 합니다. "당신들은 잘 못 생각하고 있소, 당신들과 나는 본질적으로 달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릇 같을 때에는 우리가 마음이 통할 때가 있습니다. 다름을 강조하면 마음이 닫히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과 같이 태어났고, 자랐고, 같이 교육받았고, 당신들과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누군가 특별히 전도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와 나의 동질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고야 전도가 됩니다.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해야지요. 고생을 많이 하고 외롭게 사는 사람에게 전도하는데 "나는 외로움을 모릅니다." 이렇게 전도하면 되겠습니까? 전도하는 쪽에서도 "당신이 고민이 있군요. 나도 고민 많습니다. 나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바울은 지금 "당신과 나는 똑같습니다." 하고 말씀을 시작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핍박했던 것이 같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는 나도 당신들처럼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소. 나도 공문까지 받아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다메섹까지 가던 사람이요." 라며 그 동질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바로 "다르다" 는 것입니다. "당신과 내가 다른 것 한 가지는 바로 내가 예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를 게 없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건만이 다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있고, 내가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 때문에 당신들과 꼭 같았던 내가 지금은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고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포로가 되었던 첫날을 얘기합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주님이 나를 포로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빌3:12)" 잡힌바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완전히 포로가 되었다 함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그리스도께 붙잡혔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예수님을 선택했고 '내가 똑똑해서' 예수를 믿었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겐 아무런 자유도 없었습니다. 때로는 질병을 통해, 때로는 실패를 통해 혹은 역경이 어떤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강권적으로 붙드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본래 저들과 꼭 같았는데 나는 붙들려서 포로 되었다. 라고 말씀합니다.
또 하나는 계시적 이라는 것입니다. 행26:19 에 보면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서 보였다 - 이것은 계시를 받음입니다. 내가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을 들었고, 하늘에서 오는 사건을 만났는데, 이것은 계시를 받음이라, 나는 이것을 저버릴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순종하는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을 보면 내가 받은 계시가 확실하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 설명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오정쯤 되어(6절)' - 여기 오정이라는 말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만일 반대로 내가 잠을 자는데, 자정에 꿈을 꾸는데, 하면 어떻게 될까요. 밤중이라면 몽롱한 가운데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정오, 밝은 대낮에, 정신이 똑똑할 때에 바로 이 사건을 만난 것입니다. 잠자다가, 꿈꾸다가, 몽롱한 가운데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확실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확인했다고 말씀까지 합니다.
'주여, 뉘시니이까(8절)' - 바울이 키가 작았다고 하니 역시 작은 고추가 맵나 싶습니다. 하늘로부터 밝은 빛이 나오면서 눈을 뜰 수가 없게 되고, 거기다가 "사울아" 하는 음성이 들렸으니 그저 '나 죽었네!' 할 판인데 '당신 누구요?' 하고 묻다니 참 대단한 용기의 사람입니다.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주의 음성을 똑바로 듣겠다 함입니다. 이렇듯 확인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밝은 정오에 똑바로 '주여, 뉘십니까?' 라고 확인한 것이고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께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7절)"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아' 라는 부름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예수님을 핍박한 때가 언제 있었나 했을 테니 "내가 언제 당신을 핍박했소"라고 대들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주님을 핍박하기는커녕 만난 적 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한 것임을 이것을 그제야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가끔 우리는 여기서 실수를 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님의 사역, 교회 사역을 훼방하는 것이 예수님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40)" 또 너희를 핍박하는 자는 너희를 핍박하기 전에 나를 핍박하고 있음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는 "누구든지 나의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할 것(마10:42)" 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핍박하느냐" 여기서 바울은 완전히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바울의 계속되는 간증을 보면, 주님께서 바울의 생각을 묻지도 않으시고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10절)" 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제부터는 내게 자유가 없어졌습니다. 가고 오는 것도 내 자유가 아닙니다. 나는 완전히 그리스도께 붙들려 살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은 곧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핍박하고 있는데 이것은 곳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다메섹 도상에서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던 그 주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을 향해 어째서 너희들은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핍박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려는 요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의견이나 지식, 혹은 자기 인격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당신들과 똑같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고 계시다 는 사실만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바울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내가 있는 것은 내 인격으로도 아니요, 내 지식으로도 아닙니다. 나는 본래 당신들과 똑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은혜, 예수능력, 예수생명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찌하여 당신을 핍박하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이제는 예수님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가 되지 마세요, 하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듯 삼엄하고 그렇듯 중요한 시간에 생명을 걸고 전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