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8:1-11 ㅣ김남수목사]
아덴에서 떠난 바울은 또 하나의 헬라 대도시인 고린도에 왔습니다. 아덴이 학문과 철학과 예술의 고도인데 비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신흥도시 이었습니다. 아덴 전도에 실패한 바울은 잠시 머물고 훌훌 아덴을 떠나, 그는 고린도에서는 1년 반이나 머물면서 전도했습니다. 이곳에는 큰 교회가 설립되었고, 바울이 이곳에 보낸 서신도 고린도전후서 두 권이나 지금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고린도 전도의 중요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대로 바울의 아덴에서의 전도는 실패했는데, 왜 대 사도가 실패했을까요?
첫째는 그가 지식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마는 스스로 자기 모든 지식과 죄를 다 버렸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쑥 불쑥 안다는 문제가 나와요. 이것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지식이 필요한 것이지마는 그러나 하나님의 사업에 있어서는 지적인 방법이 완전히 씻어져야 하고 불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선교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적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순수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께서 주신 방법으로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저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우상, 신상을 보면서 “알지 못하고 섬기는 그 신을 내가 알겠다” 는 것이 잘못된 발상이 된 것입니다. 또 하나, 철학적 방법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 종일 변론했고, 토론했고, 쟁론했습니다. 철학자들과 쟁론한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말싸움을 해가지고 전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도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혹이라도 여러분이 누구에게 전도한다고 할 때에 말싸움을 벌이지 말 것입니다. 말로 이기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기든 지든 전도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본문을 봅시다.
1-3절에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고린도에 와서는 아덴에서 실패한 후유증이 남아 있어서 용기를 잃어 버렸습니다. 아주 심약해져서 복음을 전할 용기를 잃어버리고, 성경을 보면 바울은 아주 비참해졌습니다. 천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3절에 보면 “천막을 만드는 일” 요새로 말하면 공장지대에 가서 내가 이러 저러한 기술이 있으니 좀 붙여 달라고 해서, 한 마디로 말하면 임시 취직을 해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하게 됩니다. 선교를 위해 전략상 천막 만드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호구지책 이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학자입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배운 기술이 있습니다. 천막 만드는 기술이 있어서 그는 어디가나 이것 가지고 살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귀한 직업이 못되는 것입니다.
가죽을 기워서 천막을 만드는 것이거든요. 옛날에는 가죽을 기워서 천막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가죽을 만져야 합니다. 목자들이 쓰는 천막, 지금으로 말하면 임시 주택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고린도에서 무난히 살 수 있었지요.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것은 바울이 어느 사이에 대 사도가 평신도로 전략했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프로였던 사람이 아마추어로 떨어졌습니다. 전심전력으로 온 시간을 다 바쳐서 전도하던 사람이 이제는 잠깐 잠깐 개인 전도하는 정도로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지키게 되고, 회당은 간 것이고, 그러니 복음은 전했어요. 이정도 가지고는 바울답지 못해요. 일주일 내내 자나 깨나 하루 종일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딱하게도 이렇게 되고 말았어요. 천막 만드는 직업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이라고 생각됩니다. 로마서16:3-4절에 보면,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동역 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 이 사람들은 참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도 바울을 위하여 일평생을 수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로마에 간다고 할 때 벌써 로마로 가 있어요. 그들은 본래 로마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다 추방할 때에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와 있다가 나중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갈 때에 에베소에 따라 갑니다. 앞으로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에 간다고 하니까 벌써 로마에 가 있어요.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수차 갇혀 고생할 때 시중을 들었고, 마침내는 사도 바울처럼 순교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참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이사 다니면서 바울을 뒤에서 ‘support’ 한 평신도 지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고린도에서 만나게 됩니다. 대단히 중요한 협력자, 동여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이 눈 여겨 볼 것은 5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의 포로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고전9: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화를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병이 재발했을는지, 또는 심령 적으로 겪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을 것인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을 것이면 자기는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긍휼을 베푸신 것도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지, 아니면 벌써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를 입을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실패하고 고린도에 와서 지금 실의에 빠졌고 울적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 심령이 침체된 가운데 있는데 이제 동역 자를 만난 것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 아주 오묘한 뜻이 있습니다. 삶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아요, 그러면 울적해지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해요. 그러데 실라와 디모데가 돌아 와 합류하게 되므로 불이 붙었어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디모데 앞에서 믿음의 아들 앞에서 나약해져야 되겠어요? 실라 앞에 그래도 되겠습니까? 서로 격려가 되어서 용기를 내게 된 줄 압니다. 여러분도 믿음이 잘 자라려면 처음 믿는 사람을 잘 인도해야 돼요. 이를테면 수요예배 나올까 말까 하다가도 처음 믿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인도하던 중이라면 그 분을 인도하기 위해서라도 나와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다 보면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돕는 것입니다. 서로 권면하게 되고 서로 격려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오늘도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 나오는 수도 있지마는 다른 사람의 권면으로 나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권면하기 위해 나오기도 합니다. 그리저리해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로서 바울에게 왔을 때 합류하면서 용기를 얻었어요. 그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용기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고 하니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둘씩 둘씩 파송했습니다. 서로 서로 격려함을 얻도록 힘을 얻도록 말입니다. 그러니까 독처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신앙생활도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요. 함께 하는데서 공동체 속에서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오늘 본문을 보니 유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6절에 보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 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유대인들이 또 역시 핍박을 하는 입니다.
반대하고 핍박하고 훼방하니까 바울이 옷을 털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 갈 것이요” 합니다.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내가 할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이지요. 내가 할 본분 할 일을 다 했다.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해야 할 것은 다 했다. 이제 남은 부분은 당신의 책임이다. -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전해야 될 일 수고해야 될 일에 대해서 한계까지 최선을 다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장에 보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누누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책임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이방 사람들은 듣는데 왜 유대 사람들이 믿지 않는가? 민족적 우월감 문제입니다. 예수 믿는 거 좋지만 이방 사람들이 같이 믿는 거 질색이 예요.
예수 믿어도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들하고 똑같이 믿는 것은 딱 질색이에요.
예수를 믿어도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들은 좀 달라야지요. 같아진다는 데 기분이 나빴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마음으로 인해서 복음마저 져버리는 불행을 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도 교회에 다니든 사람이든 처음 믿는 사람이든 간에 자기 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런 신앙생활은 항상 문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7절에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디도 유스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비방하고 훼방하며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자 유스도의 집으로 옮겨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침 유스도의 집은 회당 옆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이 쉽게 찾아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로 그는 그의 거주지를 옮기 것이 아니고 다만 예배 장소만 옮겼습니다. 디도 유스도는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자기 집을 고린도 전도 사업의 본부로 제공하는 호의를 베풀었으며, 후에는 그의 집이 고린도 교회의 최초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일보다 자기의 소유와 물질에 더 깊은 애정을 쏟고 있는 현대 교인들에게 아주 귀한 교훈을 줍니다.
8절에 “회당 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고린도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처음으로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회당장 그리스보였습니다. 그리스보와 그의 가족들은 바울이 회당을 떠나자 그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다른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과 이방인들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으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특히 이곳 전도는 그리스보의 회심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또한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세례를 받아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 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럴 때 마귀가 떠나 가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전도하여 믿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리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바울도 고린도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어 구원받은 것을 확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보는 마지막으로 중요한 말씀이 9절에 있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복음 전파하는 데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결과에 대해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전하는 것뿐입니다. 전해서 효과가 있을까, 이 사람이 믿을 까 안 믿을까 이런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씨를 뿌리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대상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아하면 나보다 좀 못한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쉬워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것도 쉬워요. 그런데 고관들에게 전할 때에는 벌벌 떨어요. 나 보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감히 내가 어떻게” 하면서 뒤로 물러서요. 복음 전파에는 남녀노소 지위고하에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 예수 믿어야 되는 것이므로 누구든 다 죄인이므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어떤 이유든 간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 내게 돌아 올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핍박을 받게 되나. 이런 것도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결과도 두려워하지 말고, 대상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 자신에게 오는 피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본문에 강조한 말씀은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하십니다. 대단히 귀한 말씀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러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어요. 시원치 않은 사람이 무얼 한다고 다니며 예수를 전하누. 조용히 예수 믿는 사람의 본을 보이면 되는 거지 - 이런 벙어리 교인이 될 때가 있어요. 내가 행위로 전도하겠다고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서 내 행위를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긴다는 말입니까? 행위로도 본이 되어야겠지요.
그러나 내 행위가 거룩하고 깨끗해서 내 행위를 보고 모든 사람이 예수 믿기를 바라는 마음도 문제인 것입니다. 나도 허물이 있어요. 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면 “너나 잘 믿어라” 할지도 몰라요. 그런 말 들어도 좋아요. 그런 말 들으면서도 복음을 전해야 돼요. “그래요. 나도 지금 애쓰는 중입니다. 좌우간 예수 믿으십시다.” 해야지. “날 따르라”한다면 나를 전한거지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까?
내가 거룩해진 다음에 입을 열겠다고 한다면, 죽을 때 까지 입을 못 열고 말 것입니다. 전도 한번 못해 볼 것입니다. “당신처럼 믿을 바에야 그만 두겠어”
“당신이나 제대로 믿어” - 이런 말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상관없어요. 벙어리 교인은 교인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라고 말을 못해 봤으면 진짜 교인이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말해야 됩니다. 길거리나 차 안에서 “예수 믿으세요.” 외친 사람들을 보고 곧장 비방은 잘 합니다. 자신은 예수 믿으세요. 한 번도 말하지 못하면 서도요.
이 길로 나가서 당장 한 번 말하세요. 버스 타고 가다가 옆에 앉은 사람에게 “예수 믿으세요.” 한번 전도해 보세요.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어떤 때는 자녀들에게도 그래요. 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어떻게 믿음대로 살라고 말하나 그러다가는 한 마디도 못하고 말아요. 이것은 잘못입니다. 부지런히 계속적으로 말을 해야 돼요.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본문 10절에 신학적으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아직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백성이 여기에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잠잠하면 구원받겠느냐 칼빈의 예정론과 관계됩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다 정해져 있다면 다 믿게 될 것인데 뭘 전도하느냐 한다면, 칼빈의 대답은 “당신이 전도해서 믿도록”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전도한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만이 전도를 듣게 되어 있고, 또 듣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는 중요한 사명이 수반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백성이 많다” - 그런고로 전도하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도성에 많습니다.
판교에 많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면 구원 받을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이 도성에 내 백성이 많을 것이니라, 그런고로 너는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주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