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10-15ㅣ김남수목사]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의 박해로 베뢰아로 온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는 환영을 받으며 효과적인 전도를 했습니다. 바울은 베뢰아에 와서도 역시 자기의 습관을 따라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0절에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관습대로 어디 가서든지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메시야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 있습니다. 11절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합니다. 여기 “너그러워서”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유게네스테로이 (εὐγενέστεροί)”인데, 출생적으로 좋은 성격을 가진 삶, 출생적으로 귀족이라는 뜻이요, 신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천적이 아니고 선천적으로 그렇게 고상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noble man”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이 베뢰아 사람들이 너그러운, 신사적이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오늘 본문 성경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이 신사적이라는 말입니다. 신사적이라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첫째로 태생적으로 천성적으로 품성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람이 후천적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아주 못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품이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술이라고 하면 아예 못 먹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술 가까이 가기만 해도 얼굴이 발개질 정도로 못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체질적으로 술을 먹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도 타고난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품적으로 예수 믿기에 아주 좋은 체질이 있습니다. 반면에 내적으로 아예 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믿고 중생하려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시련을 겪어야 됩니다. 매도 많이 맞아야 변화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하는 “너그러운 ”이라는 말은 천성적으로 아주 심성이 좋고, 인간됨의 바탕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 번째로 이 사람들은 열등의식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람을 무조건 의심하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근심이나 의심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 이것이 신사적인 사람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무슨 말을 정직하게 그대로 믿지 않고, 꼭 비비꼬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든 일단 의심부터 하고 나쁘게만 보려합니다. 참 어려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비신사적입니다. 신사적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것은 그대로 좋은 것으로 볼 줄 알아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조금 참고들을 줄 알아요. 이게 바로 신사적인 것입니다. 무슨 말을 아예 의심하고, 모든 일을 아예 나쁘게만 보려고 하는 심성은 본인에게도 참 불행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크게 방해되는 좋지 않는 심성입니다.
세 번째로 편견이 없다는 것입니다. ‘편견은 무지의 지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경험, 나의 지식, 그것만을 고집하고, 새로운 진리에 대해서 마음 문을 열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신사적이라는 말은 “open-mind”로, 열려 있는 마음으로-어쨌든 이 말은 편견이 없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강한 욕망, 혹은 육체적인 어떤 필요, 이런 것에 사로 잡혀 있지 않아서 불순한 동기가 덜 작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예를 들면 너무 가난하고 어려우면 “예수 믿으면 좀 부해지려나?”라는 생각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런가 하면 감정이 메이지 않는 것입니다.
고상한 사람의 수준에는 어느 정도의 냉정함이 필요합니다. 우리 민족은 이 점에서 대체로 비신사적입니다. 감정이 앞서요.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요. 운전을 하다 조금 접촉사고만 나도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소리를 지르고 싸웁니다. 다 망해도 좌우간 화를 내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아예 운전을 배우지 않았어요. 감정 주도적인 것-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잠 18:13절에 보면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을 들었으면 끝까지 듣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듣기도 전에 “가만히 있어 내가 말할게.” 하는 사람이라면 신사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다 듣고 나서 한참 생각을 하고, 그러고 나서 말을 해도 늦은 법은 없어요. 이런 사람이 신사적인 사람입니다.
다섯 번째로 비신사적인 것은 즉흥적인 것입니다. 너무 쉽게 결정을 해요. 예수 믿는 것도 그래요. 한 마디 말을 듣자마자 예수 믿어야 되겠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베뢰아 사람들은 거저 한 번 전도 받고 예수 믿겠습니다하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러 날 동안 성경을 상고하고, 많이 생각을 하고, 그래서 받아들이고, 그러 다음에 믿겠습니다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아주 신사적이었던 것입니다.
여섯 번째 또 하나 있습니다. 신사적인 것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남들이 예수 믿으니까 나도 믿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사적이라는 것은 스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 보고, 내가 기도하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결정하는 것이지 누가 믿는다고 따라 믿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자적으로 결단하여 신앙할 때에 신사적 교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혹은 설교 말씀을 들을 때,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설교를 들으면서 한 마디도 남김없이 다 흘러 보내고 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듣기는 많이 들었지만 한 마디도 제대로 들은 게 없어요. 이런 사람은 모래시계 형입니다. 모래시계는 한 번 들어가면 곧 흘러 나가 없어지고 마니까요. 둘째는 말씀을 받은 듯하면서 받지 않고 원 상태로 돌아가는 사람, 스펀지 형입니다. 어떻게 잡힌 것 같은데 그실 잡히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좋은 말씀은 다 잊어버리고 꼭 나쁜 것만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체형입니다. 여러분 체라는 것이 있지요? 요새는 보기 힘들지마는 그 구멍 뚫린 바구니 같은 것에 곡식을 넣고 흔들면 알곡은 다 내려가고 마지막에 껍질만 남습니다. 바로 그 체 같은 심령이 있다는 것입니다. 꼭 들어야 할 말씀은 한 말씀도 안 듣고, 어쩌다가 마음에 가시 돋친 것만 듣습니다. 참 불행한 사람이지요. 넷째 좋은 말씀만 기억하는 정미기 형입니다. 잘 정리해서 쭉정이는 다 내 보내고, 깨끗하게 알곡만 받아들이는 심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얘기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베뢰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너그러운 사람들, 신사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기 신사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11절, 12절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신사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먼저는 11절에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말씀을 집중적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듣더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다해서, 열심히, 주의를 집중해서, 들었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 때문에 가끔 가정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어떤 사람이 나오면 저 사람 좀 봐라 하며 끼어들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 얘기하는 동안에 진행되는 프로그램의 내용을 놓치기가 일쑤입니다. 그래 가지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집중해서 조용히 들어야 끝까지 듣지, 저 사람 나왔다 저 사람 누구 아니냐 하고 딴 소리하다 보니, 그러는 동안에 원래의 주제는 다 까먹고 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이 복잡해요. 들을 때도 전부 듣지 않고 반만 듣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 듣고, 다른 것을 상상하면서 듣고, 그러니 기억 될 것이 없지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공부 잘하고 못하고 별거 아닙니다. 얼마나 집중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집중해야 되는 것입니다. 집중해야 이해가 되고, 기억도 되는 것입니다. 시험 보는 아이도 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집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괜히 책만 펴 놓고 있지, 사실은 공상이나 낙서만 하고 있다면 공부가 될 턱이 없습니다. 얼마나 집중하느냐?― 이것이 훈련이 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하더라도 다짜고짜 뛰어 들어 운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몸 풀기 예비 운동, 곧 “warming-up”이 필요한 것입니다. 공부도 그런 것입니다. 처음에는 집중이 안 됩니다. 더구나 방학 몇 달 동안 놀고 나서 공부하려고 들면 집중하게 되는 데는 아마도 족히 두 주일은 필요할 것입니다. 가끔 학생들이 공부를 하다 말고 놀러 간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며칠 놀고 오면 집중이 안 됩니다. 차라리 가까이서 맴돌고 있어야 합니다. 아예 며칠 놀고 외서 마음잡아 가지고 하겠다 ― 그거 안 됩니다. 마음이 잡힙니까? 휴가 때에 잘 놀고 와서 본격적으로 할 랍니다 - 안 될 말입니다. 집중이 안 됩니다. 다시 생각해 보세요. 신사적이어야 집중이 되지요. 마음이 들떠 가지고 감정 주도적으로 행동한다면, 어떻게 집중이 됩니까?
가만히 보면 말씀을 듣는 것도 그래요. 늘 들어 버릇한 사람들이 잘 들어요, 집중이 되거든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집중적으로, “full heart”로-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성경을 읽을 때도 그렇고 무엇을 하든지 온 마음을 다 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으로 말하자면, 공부할 때는 나가 놀 생각하고, 나가 놀 때는 공부 생각하고……. 미련한 것입니다. 공부할 때는 공부만 하고, 놀 때는 놀기만 하고 -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집중적으로 읽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집중적으로 들을 것입니다.어느 여 집사님이 밤에 불면증으로 고생을 한다고 합니다.
도대체 잠이 안 와서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밤에 잠이 안 오거든 낮에 주무시지 마세요.”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 때에 옆에 있던 여 집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잠이 안 오거든 성경을 읽으세요, 그러면 잠이 잘 옵니다.” “성경을 그러게 보아서는 안 되지요, 잠옷 바람으로 성경 보지 마시고, 배 쭉 깔고 누워서 읽지 마세요. 성경은 기도하고 정성껏 하나님의 말씀을 볼 것이요, 정좌해서 볼 것입니다. 바른 자세로 읽어야 그게 성경 읽는 것이지요. 가장 귀한 시간이니까요.”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더라”- 이게 신사적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1절)” 라고 말씀합니다.
중요한 것은 “상고한다”는 원문으로 “아나크리논스테스(ἀνακρίνοντες)”인데, 이 말은 영어로는 “examining”으로 시험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시험한다”는 말은 성경을 의심하고, 비판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성경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지금 전하고 있는 사건과 성경이 어떻게 관련되는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그것을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상고한다” 는 뜻은, 성경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느냐? 내 생활 속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느냐? 하나님을 믿고 사는 나는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할 때에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오늘 내가 처한 처지가 어떻게 해석 되어야 하느냐? 그런고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장 모임의 나눔지 질문이 바로 그렇습니다. 베뢰아 사람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 저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예수 사건과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느냐? 이것을 저들은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확증을 얻으려고 합니다.
아주 지적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사적인 신앙입니다. 이렇듯 다 확증을 얻은 다음에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아주 신사적인 교인들입니다.
한편 데살로니가에서 찾아 온 유대인 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와서 핍박을 합니다. 13절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여기까지 75 km쯤 됩니다. 백리를 쫓아와서 이렇듯 소동을 부리고 야단을 피우면서 핍박하는 것을 보고 사도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나한테 비하면 당신들은 그래도 약과요”했을 것입니다. 그 옛날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그랬으면 됐지 바울은 다메섹까지 악착같이 쫓아 갈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우간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남김없이 끌어다가 죽이려고 극성을 부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그 같았던 극성스러움이나, 지금의 저들의 극성이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가서 핍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 저들은 대항하지 않고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대로 아덴으로 가게 됩니다.
14, 15절에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왜 빌립보 감옥에서와 같은 기적을 기대하지 않고 피신합니까? 왜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갔다가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을 또 한 번바라지 않고 조용히 피해야 했더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저들이 유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지금 바로 깨닫지 못해서 그럴 뿐이지,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의 눈이 있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인다. 유대 사람 저희끼리 싸운다. 이렇게 볼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므로 하나님께 욕 돌릴 수는 없어요. 바울이 피신하는 심경을 속속들이 다 헤아려 보기는 어려우나 거기에는 마땅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아무튼 그는 유대 사람 핍박 앞에서 유대인들과 같이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방 사람들한테 추한 꼴을 보이지 않고자 하여 엄연히 잘못한 것인 줄 알지마는 그들을 피해서 다른 것, 아덴으로 갑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 일행의 처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