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22-35 ㅣ 김남수목사]
오늘 본문에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사항을 안디옥교회와 이방교인들에게 전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인 유다와 실라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 돌아와 총회의 결의문을 전달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교회는 안정이 되고, 이방인의 신앙이 예루살렘 총회에서 인정됨으로 이방전도는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I. 결의문을 사명감을 가지고 전달할 대표자를 선택함(15:22-27)
결의문을 편지를 써서 보내면 그만일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전달할 사람들을 선택합니다. 행15:22, 23절에“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말로만 전달하면 와전되기 쉽기 때문에 글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글은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글은 생각의 삼분의 일 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글은 장점이 있어요. 한 번 기록해 놓으면 몇 천 년이 지나도 그대로 보존 전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은 2000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더해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고, 영 딴 소리로 둔갑하는가하면, 엉뚱한 소리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말로 전해지는 것과, 글로 전해지는 것이 합쳐질 때, 가장 바르게 전달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지를 가지고 가서, 결의문을 전달할 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선정하여 회의 분위기를 말로 설명하여 전달할 사람이 필요해서 전달자를 선택합니다. 전달자는 공신력이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먼저, 당사자인 바울과 바나바를 선정합니다. 그런데, 걱정이 되는 것은 그 말에 편견이 개입될 수도 있고, 듣는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해서 제 삼자인 바울과 실라를, 회의 중에 참석한 증인들을 보내기로 합니다. 그들을 함께 보내어 설명도 하고, 한 사람은 옆에서 증거를 하므로 예루살렘 총회에서 의논 된 사람의 본뜻이 가감 없이 전해지도록 신중을 다한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바사바라 하는 유다는 행1:23절에서 사도직 보충을 위해 지명한 사람 중의 한 사림으로 요셉은 예루살렘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전달사항은 29절 한 절로 아주 간단한 한 절입니다. “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 것 뿐입니다. 간단하지만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 그때 회의 중 이루어졌던 분위기를 함께 말하기 위해서 신중을 기한 것입니다.
말이란 할 말을 다 해 버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편에서 어떻게 듣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생각해 보며, 결정할 때 이루어졌던 분위기를 편견이 없이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신중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분위기를 전달하는 말과 결의 사항을 합쳐서 들을 때에 듣는 사람들이 본뜻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편지에는 유대교의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정당하고 강력한 비난이 퍼 부어 졌습니다. 24절에“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들은 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아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것을 듣고 매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쓰는 것은 그러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거짓교사임을 여러분에게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들로부터 왔다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추천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없고 추천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우리 사도들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들의 말은 이방인 개종자들을 당혹하게 하였고 괴롭혔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신뢰하여 왔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 자들 때문에, 여러분은 스스로 함정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혼돈케 하며,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그들은 여러분들의 신앙을 허물어뜨리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서신을 가지고 가는 전달자들에 대한 영예로운 추천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추천입니다.
25, 26절에“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이들은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사람들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유명케 된 사람들로,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분들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였으며 충성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위험한 일에도 참여 하였습니다. 편지를 가지고 가는 분들은 이렇게 신뢰할 수 있는 분들이니 이 사람들을 믿고, 그 분들의 말을 잘 들으십시오.
이러한 내용의 중요한 말인 것입니다.
다음은, 유다와 실라에 대한 추천입니다.
27절에“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의 회의에 참여하여 모든 논쟁을 청취한 사람들이며 그 일을 완전무결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회의의 일을 말로 전할 사람들입니다. 편지를 보고, 또 입으로도 말한 것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유익한 일입니까? 또한,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라고 합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다툼과 변론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노라”- 그것뿐입니다. 여러분, 회의에서 오래 떠들었어요. 본래 회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결론이 났으면 딴 소리할 것 없습니다. 딴 소리가 있으면 안 됩니다. “이러 이렇게 결정되었습니다.”라는 말만 해야 합니다. 누가 이랬느니 저랬느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회에서, 제직회서 다 결정했어요. “가하면, ‘예’하시오”해서 만장일치로 결정했어요. 그렇게 결정 난 이상 딴 소리는 없어야 하는데, 나중에 보면 말이 많아요. 누가 반대했느니, 누가 어떻게 했다느니……. 쓸데없는 소리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결정이 됐으면 이제는 아무 말이 없어야 합니다. 회의 중에 의견이 분분할 수 있습니다. 열띤 토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갑론을박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이 나온 다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II. 이방인 개종자들에 대한 결의문의 지시 내용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내용은 야고보의 종합적인 결론으로 유대인의 자극을 피한 것으로 위로와 격려입니다. 행15:28, 29절에“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그들은 권위 있는 자세로 결의문을 전달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그들에게 가한 줄 알았다”고 말한 것은 성령의 권위로써 말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와 지시에 의하여 그것이 가한 줄 알았다고 합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부여 받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그쳐진 자들이 아는 척 하는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적합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기에 지시 할뿐만 아니라” “성령이 이미 그 이전에 결정하신 것을 말한 것이라”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했을 때에,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부여 했습니다. 또한, 성령은 베드로의 설교에 의해, 고넬료와 그의 권속들에게 임하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장벽을 무너뜨리기로 계획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명백히 나타내시는 증거입니다. 결의문의 지시내용은 29절에 야고보의 종합적인 결론에 따른 것으로“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입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알고 있는 고기는 어떠한 것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피를 마셔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목매어 죽인 것은 어느 것이고 먹어서는 안 되며, 자연사한 것이나 피를 완전히 뽑아내지 않은 것도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음행의 죄를 범한 사람들과, 또한 레위기의 법으로 정해진 금지된 계율을 어기고 거행하는 결혼을 엄하게 견책하고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29절에 보면“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스스로 삼가면 - 여기에 상당한 자율성이 있습니다. 원래 율법이라고 하면, 율법이 있고, 그에 대한 해석이 있고, 그에 대한 적용이 있기 마련입니다. 본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떻게 적용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그런고로 본문은 말합니다. “스스로 삼가면”- 자율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십계명을 바로 지키자고, 무려 613가지의 부칙을 만들었습니다. 부칙 613 가지를 저들은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놓고 저들은 다 지켰다고 교만하고, 이방인들은 못 지켰다고 멸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율법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많은 충돌이 있었는데 이는 율법의 해석 차이였습니다. 다 같은 율법을 가지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로를 세우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지켰다 - 이것을 자기 의로, 자기 자랑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것을 다 무시합니다. 예수님의 율법관은 언제나 본질로 돌아갑니다. 본래 왜 계명을 만들었느냐 – 하십니다. 계명은 전부가 하나님의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 이것이 율법의 전부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율법을 지키되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율법관은 이랬습니다. 미국의 재벌 교인 와너 메이커는 백화점 왕이요, 이 사람은 미국에 많은 백화점을 열고 체신부 장관까지 지냈습니다. 매우 바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일날이면, 교회에 가서 교회학교 반사도 했고, 교회학교 교장도 했습니다. 그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는 것은 본업이고, 일주일 동안 일하는 것은 부업입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한지 60 년이 되어 기념식을 할 때, 많은 사람이“당신은 어떻게 해서 성공한 것 같습니까?”그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쁘게 하는 것이요”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킴에 있어서는 언제나“즐거운 마음으로”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믿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받았으니 마땅히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받았으니 마땅히 사랑해야 합니다. 기독교 윤리를 통틀어 한 마디로 말하면, ‘마땅한 윤리’라고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는 것이 자율입니다. 스스로 성숙한 가운데서 알아서 하세요.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해석하고, 스스로 적용하고, 그리고 이제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야 합니다.
III. 결의 사항 전달자의 거취결정 문제
30, 31절에“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회의가 끝난 후,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갔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에 도착하자“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달 하였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훈령에 대하여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려는 시도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던 사람들은 이로써 평정을 얻게 되었고, 사도적인 권고라고 자칭하던 자들의 허풍과 거지 교훈을 몰아내고, 거짓 교사들은 궁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방 개종자들은 용기를 내어 복음을 받게 되었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복음에 그대로 머물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평화가 다시 회복되었고, 분열의 위험은 제거되었습니다.
32절에“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유다와 실라도 선지자였는데, 성령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에 관하여 전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었으므로 “여러 말로 형제들을 권면하여 굳게”할 수 있는 자로 신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계속적인 설교를 듣던 안디옥 교회 신자들이 유다와 실라의 가르침으로 즐거워하였습니다.
33절에“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예루살렘에서 온 사역자인 유다는 안디옥 형제들로부터 친절과 경애어린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안디옥에 있는 신자들은 그들이 먼 길을 와준 것과, 노고를 치하하였으며, 그들이 베푼 봉사를 감사했습니다. 34절에 실라는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을 때, 유다와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가려하지 않고, 유다가 혼자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오히려“안디옥에 머물러 있기를 선택했습니다.”35절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바울과 바나바는 비록 그들이 주로 이방인들 사이에서 사역하는 것이었지마는 잠시 안디옥에 더 머물러 있으면서, 수다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며, 전파하므로 안디옥 교회는 크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살아 역사하는 교회는 말씀이 살아 있고, 성령의 역사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살아 계시는데, 말씀이 죽을 수가 없고,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신약 교회는“성령이 충만한 교회”로 치유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4대 목표 중 하나는“성령 충만한 교회”입니다. 우리 예봄 교회의 모든 교우는 성령 충만하여 표적과 기사를 체험하며, 살아 역사하는 예봄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