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13-41 | 김남수 목사]
바울과 바나바는 구브로 섬에서 전도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대륙으로 상륙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전도하러 가는네, 밤빌리아 안디옥에서 마가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하며 회당에서 긴 설교를 했습니다. 바울의 첫 설교인데 그 내용은 먼저 1) 17-22은 구약의 역사를 죽 말하고, 2) 23-25에서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이심을 밝히고, 3) 26-38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속을 완성하셨음을 증명한 후, 4) 39-41은 결론 부분으로 인간이 복음에 관해 믿음으로 반응을 보여야 함을 권하며, 거부하고 믿지 않음으로 멸망을 당할 것을 경계한 내용입니다.
I.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행13:13-15)
13절에“바울과 및 동행하던 사람들이”바울과 바나바의 위치가 바뀌게 됩니다. 바울이 선교를 주도적으로 인도하였기 때문에, 지도력이 바울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제부터 바나바와 바울이,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는 것입니다.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마가가 도중에 버가에서 되돌아 가 버리는 것입니다. 왜 되돌아 가 버렸을까요?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가려면 해발 1100m를 올라가야 하는데, 길이 험하고 산 속에 도적떼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그 지방에는 극심한 말라리아 병이 성행했다고 합니다. 이 병에 한 번 걸리면 나약한 사람은 죽고 살아남는다 해도 두 주일 이상은 고생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약한 마가가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를 붙들고 전도 여행을 떠나자고 하니까 “나 안 갈래요”하는 것입니다. 기어이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마가는 나약한 사람입니다. 개별적인 사명감 부르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중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본 절의 내용입니다. 마가는 좀 더 적극적이고, 좀 더 강인하고, 좀 더 충성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마가가 뒤늦게 회개하고 충성했습니다마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선한 일, 하나님의 사역, 이 귀한 일이 절대로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업에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불평이나. 변명이나, 원망의 일에 빠지면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큰 사역에 이탈자의 심령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II. 바울의 설교(행13:16-41)
바울은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 날 회당에 들어가 설교를 했습니다. 16절에“일어나 손짓하여 말하되”유대 랍비들은 앉은 자세로 말하거나 가르치는데, 예수님께서도 산살 설교를 하실 때 보면, 마5:1에“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어나 강단에 서서 손짓하며 말씀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꼭 들어야하고, 깨달아야 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나 손짓을 하며 정렬을 쏟아 설교했던 것입니다. 행 2장에 배드로의 설교가 있고, 7장에 스데반의 설교가 있으며,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설교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중요한 공통점은 모두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죽 개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역사는 아브라함 때로부터 모세로 다윗에게 죽 이어지고 그 역사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왜 역사를 이야기 하느냐 하면, 성경을 이해하는 눈을 가지려면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기독교 교리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경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뜻밖에 갑자기 이루어지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비하신 일임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역사를 죽 이끌어 오셨고, 예언하시고, 예표, 그림자를 들어 말씀하시다가, 마침내 실제적인 것으로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1) 구약의 역사(17-22)
17절에 보니“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이들이 남보다 잘 나가거나 의가 높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아브라함을 택한 것이요.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방에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고 못 받고는 그의 믿음에 달려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선택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요. 본인이 구원받고 못 받고는,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했느냐 못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18절에“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이렇듯 놀랐습니다. 그들이 죄 짓는 대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로 내리치셨다면, 진작 다 끝났었지요. 그러나 오래 참으셨어요. 못돼 먹게 굴어도 참으시고 그나마도 남아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 그렇지 않았다면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 있다. 선택하시고 인내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다음 19절에“가나안 땅 7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450 년간이라” 저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용맹스럽게 싸워서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고 저들은 은혜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역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왕을 달라고 합니다. 20절부터 21절에“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40 년간 주셨다가” 사무엘상을 보면 왕을 달라고 할 때, 저들이 나로 하여금 왕 되지 못하게 한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몹시 섭섭해 하셨습니다. 왜 왕이 필요 하느냐? 원수가 쳐들어와도 내가 다 막아 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왕이 필요하냐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왕을 세우고 으스대는 것을 보고, 우리도 인간의 왕을 가지고 싶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너무 졸라대니까 하나님께서 양보하시고 크신 허락을 하십니다. 그래서 사울을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사울의 처음과는 다르게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폐하시고 다윗을 세웠습니다. 이 다윗은 두고 하나님께서 22절에“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다윗의 왕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메시아 그리스도이심(23-25)
23절에“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후손(씨)”라고 합니다. 다윗의 후손 중에서 구주를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긴 역사를 말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시고, 그림자로, 예표로, 말씀하신 그 분이 오시는데, 바로 내가 증거 하는 예수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죽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24-25절에,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 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메시야가 오시기 전 선구자가 먼저 와서 회개를 통하여 길을 예비한 것은 4 복음서의 기사와 공통됩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므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알렸습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묻기를“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그리고 대답하기를“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다”고 말씀하십니다.
3) 메시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심(26-38)
다음 26절에“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구원의 말씀”에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구원의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말씀”이 “로고스”라는 말입니다. 로고스는 옛날에는“도”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로고스라는 말은 쉽게 번역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요1:1에“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할 때 말씀이 로고스입니다. 요1:4에도“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선재(先在)하신 예수가 로고스이십니다. 마, 막, 눅 복음에는 로고스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 1장에 나오는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로고스입니다. “이 구원의 말씀을”보내셨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로고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본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울은 이를 두고“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성경이 예언하신대로 이렇게 귀한 분이 오셨는데, 저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27절에“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알지 못함으로” 유대관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알지 못한 무지에 기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알지 못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 후로 예루살렘은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예루살렘 궁전 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죄, 모든 실수가 그렇습니다. 이게 이렇게 되면, “망한다는 것”을 알면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27절에“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말씀을 많이 외우기는 곧잘 하는데 뜻을 모릅니다. 말씀을 많이 외워야 하지만, 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외웠지만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뜻을 이해하며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잘 알지 못함으로 유혹과 이단에 빠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간악한 죄악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28절에“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놓아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죽여 달라고 외쳤습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요,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찌 그래 잔인합니까? 인간의 어리석은 포학한 잔인성이 그대로 여기서 표출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건 속에서“하나님은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29절에“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결국 잔악한 행위, 그 무서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라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 이 사실을 역사의 중심에 두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34-38절에“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다윗은 죽어 썩어질 무덤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미리 예언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지고, 그 죄 값으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썩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죄 값이 완전히 지불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죄 사함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이 자기 죄로 죽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썩어 무덤에 있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져 있고, 우리의 구원도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큰 확실한 증거요. 온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4) 결론: 복음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믿음(39-41)
오늘 본문 39절에서 사도 바울은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이 말씀이 바울의 설교에서 맨 처음 나오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느니라.” 이 말씀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즉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도덕법과 제사법으로 나누어집니다. 도덕적인 죄 값은 사망입니다. 도덕법은 그 누구도 완전하게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사망의 법, 죽이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법을 주셨습니다. 죄를 지은 자마다 제사를 지내서 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예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예표의 본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제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죄인이 의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하나님의 의” 곧“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덮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게 되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인간의 반응인 믿음이 없을 때를 경고합니다. 마지막으로 40, 41절에“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삼가라”- 복음은 전해지고 구원은 받겠지만, 그 복음을 멸시해서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심판적 요소가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진다고 해서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질 때, 인간 편에서 반응을 보여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있고, 마음이 완악해서 믿지 않으므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너희는“삼가라”- 혹이라도 그 은혜에 미치지 못할까 조심하라, 멸망당할까 조심하라,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꿈에 하늘나라에 갔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심판대 앞에 섰는데 하나님께서 심문을 하시더랍니다. “너는 일생동안 진실하게 살았느냐”아닙니다 그렇게 못 살았습니다. “너는 깨끗하게 살았느냐”깨끗하지 못했습니다. “정직하게 살았느냐”정직하게 못 살았습니다. 목사님이 이제 틀렸구나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내심 지옥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광채가 비치더니,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이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하고, 진실하지도 못한 것이,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믿었고, 내가 저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을 믿었고,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평생을 바쳤습니다. 제가 이 사람을 변호하겠습니다.” 그러더니 하늘 문이 열리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일어나 보니 꿈이더랍니다. 여러분! 이것을 단순한 꿈이라고 치부해 버릴 일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