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17-37 | 김남수 목사]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성공적으로 전하자 두 번째 핍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특히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 감옥에 가주었으나,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기적적으로 탈출시켜 성전에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공회 앞에 끌려 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도들은 담대히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들의 모습과, 그 방법, 그 결과들을 그림을 보여 주듯 보여주고 있습니다. 증인은 자기의 의견이나 자기의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이것을 내가 듣고 보고 체험했다- 그것뿐입니다. 법정에 서는 증인도 내가 사건현장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것만을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증인은 자기 의견이나 철학을 말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증거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건이 그에게 현실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건이 있지마는 그 사건을 내가 모르고 있는 한, 그 사건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엄연한 사건이요 중요한 사건입니다마는 내가 모르는 것이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건을 알려야 하고 믿게 해야 합니다. 믿어야 그 사건이 나에게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에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에 대한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때문에 누군가가 전해 주어야하고, 믿게 해주어야 합니다. 여기에 증인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들도 “이 일에 증인이요”(32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증인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고, 증거하여 믿게 하는 것입니다. “증인”이란 헬라어로 “마르튀스”인데, 영어로 옮기면 “martyr”, 우리말로 번역하면 “순교자”란 뜻입니다. 이 말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란; 생명 바쳐 피를 흘려 증거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 순교하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좀 더 깊이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뵈었습니다. 사도들은 순교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여기서 잠깐 예수님의 증인의 자격을 좀 생각해 봅시다.
먼저, 예수님의 증인에게는 예수님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직접적인 체험이 필요합니다. 배워서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증인은 보고, 듣고, 체험한 바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증인에게는 증거하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분과 함께 죽을 각오가 안 되어 있다면, 직접 보고도 못 봤다고 합니다. 귀찮으니까요. 같이 말여 들어가서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이 귀찮으니까요. 보고도 못 봤다고 합니다. 문제는 내가 위하여 증거하는 분을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증인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비겁하면 중인이 못 됩니다. 내가 이 사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난도 참을 수 있다. 생명이라도 바칠 수 있다.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행 1:8에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성령 받으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받으면 달라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체험이 확실해 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아가 용기가 생겼습니다. 이로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이나 같이 하면서 부활에 대하여 듣고, 배웠고, 보았지만, 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같이 죽을 각오도,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후, 신령한 용기와 사랑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믿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영생,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에 관해 본문 행5:30-32에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 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I. 첫째로 사도들이 증거한 예수님의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부활하심의 성경적 의미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기독교의 중요한 핵심진리입니다.
인류 첫 조상 아담은 죄가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평화롭고 사랑 가운데서 목적을 가지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에게, 무엇을 선택하고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풍족한 삶을 살 수도 있었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 죄 가운데서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후자의 길을 택함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가 아담의 마음속에 들어 왔습니다. 이러므로 아담의 생명인 피에는 죄의 씨앗이 들어왔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고 태어난 인간은 모두가 죄 가운데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 증거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면 죄를 가르치거나 배우지도 않았는데도 죄를 짓고 그것을 좋아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 가운데서 태어난 죄 성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롬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다 죽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깊은 구렁을 만들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평화와 사랑, 목적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죄 가운데서 공허와 무의미 욕구불만과 갈등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세상법이 죄라고 하는 것도 죄이지만, 문화에 따라 어느 나라에서는 죄가 아닌 것이, 다른 나라나 민족에서는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부다처주의를 따르는 아프리카 탄자니아 마사이 족에게는 일부다처주의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대부분의나라에서는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것을 불순종하면 죄가 될 뿐만 아니라, 하라고 한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합니다. 또한, 죄는 행동으로 지을 뿐만 아니라, 성경이 금하는 것을 생각이나 말하면 죄가 된다고 합니다. 이러므로 아담의 피를 받고 태어난 인간은 예외 없이 아담의 혈통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의 씨앗이 핏속에 있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본성, 생명을 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종교의 창시자나, 도덕가, 철학자도, 자기 죄로 죽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썩어 망했습니다. 즉 영생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이 절대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바로 그 구원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어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놓으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한하신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죄가 없는 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히1:5)고 하셨으며,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요10:25-30) 사람은 사람을 낳고, 양은 양을 낳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님을 하나님이 직접 낳으신 하나님과 똑같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므로 요일 5:20 절에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참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고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권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태어나셨으므로 (눅1:31-32, 35) 인류 원조 아담의 피, 즉 예수님의 피에는 죄의 씨가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피 (행20:280), 참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 의인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 없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마1:21절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말씀하셨으며, 이사야 53:6절에도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우리 모두의 죄를 예수님에게 옮겨 얹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 죄 값으로 대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고 지옥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완전하게 복종하신 것을 보시고, 만족이 여기시며, 이제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루셨으므로 더 이상 사망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으셔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자신은 죄가 없는 의인이신 것을 온 천하에 선포하셨으며, 사람을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이러므로 인간의 죄의 빚을 갚아 주고 살려, 영생 주는 분은 예수 그리리스도 밖에 없습니다(요10:28). 베드로 사도는 행4:12에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라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인간의 구주시오, 하나님의 본성, 영생이 되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도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구주시며, 임금 주님이시라는 것을 생명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담대히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에수님은 부활하셨다” 큰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II. 자 이제 둘째로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방법과, 그 결과에 관해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1.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하매 표적이 따랐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지명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표적이 따랐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처럼 이적을 행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벌떡 일으켰습니다. 이런 표적이 사도들을 따랐습니다. 증거의 능력이 따르고, 표적이 따랐습니다.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표적은 막 16:20에 보면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 사도들은 따르는 표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명백한 사실임을 확실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확실한 표적과 함께 전하는 복음을 마땅히 모두가 믿어야 할 곳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끝까지 안 믿습니다. 안 될 사람은 끝까지 안 됩니다. 이렇듯 권능을 나타내고, 귀한 말씀을 전하는데도, 사건 자체가 이렇듯 명백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감격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끝까지 이를 부인하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복음을 전하고 반응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할 일 만을 열심히 하십시오.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복음 전파에는 언제나 심판적 요소가 따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있겠지만, 안 믿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2. 사도들이 분명히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29절에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하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말씀대로 저들은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헬라어로 “휘파코에”인데 신약성경에 4 번 밖에 안 나오는 단어로 절대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철저하게 아무 이득 없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와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섭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이렇듯 수직적 관계에서 역사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다보니 오해가 있었습니다. 불이익이 있었습니다. 핍박을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로마 정부로부터 정치적인 오해를 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를 이용하여 정치적 혁명이나, 반정부적인 음모를 꾸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갖고 있는 참에, 예수님을 가리켜 왕이라느니 메시아라느니 하는데, 로마 정부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당연히 문제가 되지요.
3. 오늘 본문은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시기하여 그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7, 18절에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언제나 시기, 질투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시기, 질투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인기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보니 자연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아졌던 것입니다. 시도들이 전하는 예수님을 믿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존경의 눈으로 우러르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유무상통하며 구제하는 사회를 이루다 보니 믿던 안 믿던 간에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과 및 사도들에 대하여 높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인기가 높아졌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의 인기가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초에 이런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지만, 복음을 전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인기를 잃어버린 사람, 실추당한 사람들이 저들을 시기 질투할 수밖에요. 불이익을 당하고 보니 예수 믿는 사라들, 특별히 사도들을 핍박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4. 사도들은 용기를 가지고 오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이 용기는 자신들의 의지적 용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용기였습니다.
20절에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성전에 서서 공개적으로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 합니다. 참으로 강한 명령의 말씀입니다. 이에 사도들은 그 즉시로 명령을 따릅니다.
21절에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새벽부터 성전에 나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모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들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천사의 명령대로 새벽에 성전에 가서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씀을 전하다가는 체포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갈릴리로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성전 한 복판에 들어가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께 의지하여 성전 한 가운데 들어가서 그것도 새벽부터 나서서 복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저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역사하신 것을 확증할 수 있었습니다. 저들은 이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감옥에서 고생한 뒤에도, 곧 바로 자신들이 체포되었던 그 자리에서 다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간 핍박하는 자들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17절에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이라고 핍박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이란 『산헤드린 공회의원들』그런데 여기에 바리새인들은 빠져있습니다. 이제 생각해봅시다. 사도들을 잡아다가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문을 열고 보니, 사도들이 없어졌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24) 여기 의혹이란 말은 헬라어의 의미는 “매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옥문도 그대로 잠겨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온데간데없습니다. 그러니 놀라고 당황할 밖에요. 그러다가 성전에 서서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희한하다”라고 분명히 저들은 한 번쯤 생각했을 것입니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더욱 악해졌을 뿐입니다. 더욱 불 신앙적으로 빠졌을 뿐입니다. 핍박 자들은 다시 사도들을 체포했습니다.
다시 체포했을지언정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록은 없고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26) 라고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결정적인 약점이었습니다. 이적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 두려워 할 줄 몰랐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문제도 아니요, 요한의 문제도 아닙니다. 지금 생각할 문제는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을 보았다면, 이 시간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베드로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 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말씀은 본문 어디에도 없습니다. 물론 당황하고, 의혹하여 어떻게 될까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도 잠시 저들은 다시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쳐다보는 사람은 용기가 있고,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은 비겁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큰 기적을 보고도 저들은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사도들은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32절에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순종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들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고, 그 복음을 증거하라 하시기에 증거했더니, 그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더욱 강하게, 더욱 충만하게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문맥이 이렇습니다. 성령 충만 이란? 성령 충만을 기다리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바입니다. 그럼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이 다시 힘을 얻어서 더욱 크게, 더욱 용기 있게,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