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14ㅣ김남수 목사]
기독교인의 신앙은 그 내용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적 신앙고백도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에 집약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확실하고 중심적인 신앙을 떠나서,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을 앞세울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기독교인의 최대 관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 예수님의 부활과 나와의 관계, 예수님의 교훈과 나와의 관계에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그 같은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부활사건과 재림사건 사이에 승천사건이 있습니다. 9-11절을 보십시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사실과 재림의 약속을 읽을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는 그것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재림에 대해서도 비교적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승천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그 의미를 대부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실은 승천이야말로 재림과 부활을 다 확실하게 설명해 주는 증거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승천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의 승천장면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에 있는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기사는 마태. 마가. 누가 등의 복음서와 이 사도행전에, 그리고 히4:14 등.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 같이 감람산을 말씀하였고,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 다음에, 부활하신 것으로 말씀하였고, 사명을, great commission을 분부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의 커다란 공통점, 승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승천사건은 우선 부활과 재림의 역사성부터를 확실하게 설명해 주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과 재림의 중간에 승천사건이 못을 박듯 확실하게 자리함으로써 부활 재림은 비로소 확실하게 구체성을 띄고, 현실성과 역사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승천이라고 하는 사건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잠깐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고 잡수시고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 사라지고 안 보이셨다가, 또 다시 어떤 때에 문을 잠그고 그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저들 앞에 홀연히 나타나셔서는 “평안하뇨”하십니다. 이 몸을 신학적 용어로는 spiritual body라고 합니다. 곧 뵐 수 있고, 만질 수 있습니다. 같이 이야기하고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렇더라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과 같은 성질의 몸은 아닙니다. 시. 공간과 물질에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다니십니다. 신령한 몸, 부활하신 몸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소화해야 합니까?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승천하시기까지 사람들 앞에 11번 나타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타나시고 저기 나타나시고 하다가 승천하게 되는데, 그 몸을 육체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예수님의 몸과 똑같은 성질의 예수님의 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그 몸은 신령한 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조건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몸입니다.
그 몸이 이제 500 여 명이 보는 가운데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구름 밖으로 사라지십니다. 저들이 멀쩡한 눈으로 보는 가운데 승천하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사건에 대한 의혹은 말끔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의 부활을 확실히 믿게 되었고, 그 현실성과 역사성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승천사건이 있으므로 예수님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부활의 구체성이 분명해 진 것입니다. 11절은 보십시다. “이르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오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신다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영으로 재림하실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꿈 하나 꿔놓고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둥 헛소리들을 합니다.
그런데 재림에 대하여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 재림은 미래적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문제가 혼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올라가실 때에 하늘로서 음성이 있습니다.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 구절이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재림 예수가 많아요. 저마다 스스로 재림 주고, 예수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재림 예수가 30 명이 넘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십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이같이 말씀하시고 나서 몸이 하늘로 올리어 가십니다. 구름에 가리어 몸이 보이지 않게 되십니다. 사람들은 구름 밖에 보지 못합니다. 멀리 높이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려옵니다. -“본 그대로 오시리라”
“본 그대로 오시겠다.”고 하시는데 쓸데없는 이야기가 왜 그리 많습니까? “본 그대로 오시리라”- 재림의 역사성, 구체적인 사실성에 대하여 재림의 약속에 대하여, 우리는 현실적으로 믿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승천사건은 이렇듯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승천사건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꿈 꾼 이야기는 더군다나 아닙니다. 또한 특별히, 이 승천사건은 누가 혼자 본 것이 아닙니다. 복수의 열한 제자들, 500 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함께 본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으로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영광스럽게 하늘로 들리어 올라가십니다.
승천은 제자들이 인격적으로, 가시적으로 경험한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있을 예수님의 재림 역시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시적이고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본 그대로 오시리라”- 너희들이 본 그대로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개개인이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다시 오시리라 하십니다. 그 때 우리 그리스도인도 예수님과 같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 예수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재림에 대한 대망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철저하게 재림신앙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서로 만나서 인사를 할 때에도“마라나타”라고 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님께서 곧 이제라도 오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사십시다.”라는 뜻입니다.
12절에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시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교의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안식일에 갈 수 있는 거리로 1km 쯤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직행해서 돌아 온 것입니다. 감람원에서 마가의 다락방으로 곧 바로 내려와 모인 것입니다.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니 갈릴리로 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마는 저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분부하셨으니 까요. 그들은 감람원에서 마가의 다락방으로 장소를 옮겨서, 예루살렘의 한 가운데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들에게 기다리라고만 하셨지, 언제까지라고 기간을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저들이 기다린 기간은 열흘입니다마는 성경에는 기다림의 기간에 대하여 며칠이다 몇 개월이다 몇 년이다 하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기다려라”-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만을 믿고 기다린 것입니다. 120명의 문도가 그대로 앉아 기다린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의 바른 응답이요, 바른 자세입니다. 기다리면서 무엇을 했습니까?
13-15절 상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살롯인 시몬, 야고보 아들 유다가 다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모인 무리의 수가 120 명이나 되더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무리의 수가 120 명이라고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여기서 120 명이란 새 이스라엘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도들이 있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한 여성들이 있고, 그리고 형제들이 있고, 그 밖에도 예수님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뒤에 남은 진실 된 알짜배기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할 수 있는 굳게 뭉친 참 제자들인 것입니다. 이 120 문도로 해서 오늘날의 교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저들은 본문 말씀대로 흩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예루살렘을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14절에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120 명이 모여서 기다리며 무엇을 하였습니까?”- 기도가 우선이었습니다.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다 모아서 오로지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칼빈은 이를 가리켜 “대표적인 기도시간”이라는 말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도 성도들이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참 귀한 일입니다. 여러분. 기도 가운데 가장 모범적이고 대표적인 기도는 저들 120 명이 모여서 드린 다락방의 그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요즈음 가끔 보면 “마가의 다락방 기도가 되게 해주시고” “마가의 다락방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고”라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기도는 진실한 기도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여러분 이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대로 엎드려 기도합니다. 추운 줄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르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진정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David Braninerd)라는 놀라운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는 육신적으로 매우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영적으로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 년 동안 폐병으로 인해 거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극한 상황인데도, 브레이너드는 북 펜실베니아의 원시림에 거주하는 북미 인디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엄청난 소명을 받고, 자주 숲 속에 들어가 차디찬 눈 속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그는 추운 겨울밤을 지새우며 너무나 간절히 기도한 나머지 땀으로 온 몸을 적셨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브레이너드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위대한 부흥을 북미 인디어안들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브레이너드는 그 장인 조나단 에드워드를 위해서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위대하고 훌륭한 복음전도자로 만드셨습니다. 실로 에드워드는 미국이 낳은 가장 훌륭한 사상가이자 복음 전도자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간절한 기도를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목숨을 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도 브레이너드 처럼 기도한다면, 부흥을 가져올 수 있고,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합심기도가 중요합니다. 120문도가 드린 기도는 합심기도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여러분, 내 중심을 다하여 다 같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가 가장 힘 있는 기도입니다. 120명이 합심하여 열흘 동안 약속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불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나라 평양 장대현교회에 성령의 불이 떨어진 것도, 원산에서 한국에 온 외국 선교사님들이 한국의 부흥을 위해 모여 계속 기도드렸으며, 블레어 선교사님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장로교와 감리교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간절히 합심하여 기도하자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참으로 더 중요합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고, 5명, 10명, 50명, 100명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할 때 큰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교회에서 환자들을 놓고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드리자. 불치의 병자들도 거의 다 나음을 받았습니다.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합 심 기도를 합니다. 마음 한 뜻으로 하는 기도, 참으로 위대한 기도입니다. 여러분 전심으로 기도하고,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부가 함께, 친지가 함께, 목장의 목원들이 다 함께, 하나의 사건을 위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함께 기도합니다. 짧은 시간의 기도이지만 함께 하는 기도이기에 그 능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120명이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 말씀에 나타난 기도의 의미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이 기도는 약속을 받고, 기다리는 기도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 약속하신 것을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옵소서.” 하는 마음을 담아 하나님 앞에 기도드립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약속을 이루어 주옵소서.”기도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셨기 때문에 응답해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죠지 뮬러는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기도했습니다. 2000 여명의 고아들을 돌보는 동안 720만 달러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 비웠습니다. 어떤 일에든지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그 능력을 이제 나타내 주시옵소서 ― 약속하신 성령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약속을 기다리는 자세를 바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큰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떨어진 것입니다. 저는 집회 때에 적게는 5-6명이, 많게는 6000-7000 명이 동시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기다림에 두 가지 경고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첫 번째 경고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정치적인 태도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라고 묻자 “너희는 알 바 아니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재림의 문제를 세속적으로, 정치가 혼란하고 사회가 어려울 때는 “아 세상이 끝나는가 보다”하고, 지진이 일어날 때는“아 말세가 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튼 재림을 정치적인 태도로 받아들이지 말라 하십니다. 두 번째 경고는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하십니다. 이 말씀이 아니었다면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아마도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너희가 본 그대로 오리라 했으니까요. 그러나 분명히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느라 허망한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사를 뒷전에 제쳐 놓고, 금식이나 철야나 하면서, 망연히 기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 일을 손 놓은 채 명상이나 하며, 기다리는 식의 대망사상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봅시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나가서 전파하라 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모든 사람으로 믿게 하라, 그래서 구원 받게 하라 하십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는 가만히 있는 자세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며 일하는 자세입니다. 노는 자체가 아닙니다. 멍청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세상이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일 할 수 있을 때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다리에 힘이 있고, 머리에 총명이 있고, 기억력이 남아 있을 때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학생들과 젊은이들은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때부터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신학적 용어로 “인케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중간 기간”을 뜻합니다, 이 “인케림”은 사명기간이요, 교회기간이요, 성령기간이요, 선교기간이요, 일하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주님 맞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승천에서 재림까지 이것이 교회의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함께 역사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저 너희는 본 그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9-11절에는 본다는 말씀이 5번이나 나옵니다. 강조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500 여명의 몇 사람만이 본 일이요, 게다가 감람원이라는 제한 된 공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재림은 우주적으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온 세계가 일시에 볼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주님의 재림을 다 같이 맞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과 기쁨과 행복으로 영광 가운데 맞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거역하는 사람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심판으로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다시 한 번 더 스스로의 경건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라도 내게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이요, 주님께서 하루라도 더디 오시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믿게 하려하심이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고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하며, 승리하십시다. 우리는 주어진 “인케림”을 열심히 깨어 기도하며, 성령 받아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데 바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 그대로 오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 맞이할 준비하는 삶을 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