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1-7ㅣ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 가운데 중요한 윤리 기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주 놀라운 기준입니다. 하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자녀같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의 근본이요 원리일 뿐 아니라, 바로 살 수 있는 기독교인의 생활 원리라는 것을 꼭 기억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원리만 바로 이해하면 나머지 부분은 술술 풀려 갑니다. 언제든지 근본이 문제입니다. 근본 원리를 바로 찾아야 합니다. 엡5:1에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처음에 주신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이다”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라”합니다. 자녀 됨이란 것은 존재론적인 것이지 윤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우리가“자녀”될 때 공부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똑똑하게 되면, 어느 수준에 가서 그 때가서 보고, 호적에 올리고 이제부터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 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낳자마자 내 아들이요 내 딸로 호적에 올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 전제가 “하나님의 자녀요, 사랑받는 자녀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윤리근본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정체의식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사랑받는 자녀다, 하는 정체의식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요3:16).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항상 증거해 줍니다. 성경을 통 틀어서 한마디 주제로 말한다면 바로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5:2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이제 최고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긍지, 그러한 감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을 풀어가야 합니다. 사랑 받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가 많지요? 가끔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막가파”니 “지존파”니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는데, 보십시오. 그들에게 하나같이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하나같이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 사랑 결핍증에서 야기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야기 합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삽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다 비뚤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 받지 못한 자, 거기서부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이 20C말엽을 떠들썩하게 했던 영국의 다이애나 전 왕자비, 다이애나 신드롬이란 말까지 생기게 한 사건들, 결혼, 이혼, 죽음... 생각해 보면 얼마나 화려했습니까? 웨스트뮌스터 사원에서 화려 무쌍하게 결혼을 했었지요. 그런데 그 가정은 깨어졌습니다. 또 여자는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있었느냐 이것입니다. 연구결과 두 사람이 사랑 결핍증 환자였습니다. 찰스 왕자, 그의 어머니는 국왕이신지라, 어머니인데도 그 얼굴조차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무슨 가정교사라 하는 사람들이고, 그는 그들 틈에서 자랐습니다. 또 왕이 된다고 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엄격한 교육을 시켰습니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사랑을 느끼지 못한 그러한 사람으로 살아 온 것입니다. 이것이 찰스 왕자입니다. 다이애나도 또 어땠는고 하니, 스펜서라는 백작의 셋째 딸로 6살 때 부모가 이혼을 합니다. 게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그 계모였던 사람이 다시 집을 나가버립니다. 다른 사람하고 또 재혼을 합니다. 그 여자의 3번째 결혼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상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사랑결핍, 어렸을 때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전혀 받아보지 못한 여자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사랑해야 할 사람이 왔어도 사랑할 줄 모릅니다. 사랑을 줄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결국 파탄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 할 줄도 모릅니다. 사랑 받은 바 없는 사람은 어느 시간에 어느 누가 나를 사랑해도 이것을 사랑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사랑 받을 줄 모른 다는 것,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이란 그의 인격도 문제요, 몸도 문제이지만은,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에 대한 이해, 사랑에 대한 철학이 똑바로 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잘 받아들일 줄 도 알고 사랑 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어렸을 때부터 그 과정을 잘 지켜 와야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 결핍증,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을 해도 받아 줄 줄을 모릅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노릇입니까? 그런고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랑을 가득 채우게 될 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 이제부터 그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라 함은 일본 신앙인이 『가가와 도요히꼬』인데, 이 사람은 고베 시장의 소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본 집에서 자라는데, 본처 소생의 아들들이 말도 못하게 구박 합니다. 미운 오리새끼 취급합니다. 그런고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것입니다. 항상 쭈그리고 앉아서 길 가는 사람들이나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구세군들이 나팔을 불면서 노방전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따라가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첩의 아들도 사랑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사랑 하고말고요” “그럼 나 예수님 믿겠어요.” 거기서부터 『가가와 도요히꼬』라는 위대한 신앙인이 탄생한 것입니다. 나는 첩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누구의 아들이든 누구의 딸 이든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겐 그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게 된 날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 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아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것이 확증 될 때 그 다음에야 우리가 뭐 사랑이고 인내고 봉사고 전도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일이지요.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시는 대로 사람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우리의 역사의식 이전 일입니다. 내가 생각으로 아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슴깊이 느껴, 가슴에 묻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병들면 한 평생 참으로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을 믿는다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고 하는 이 엄청난 특권, 그 정체의식, 거기서 출발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버지, 나는 그의 자녀입니다. 자녀이니, 아버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면 닮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요? 육체적으로도 닮았지, 얼굴도 닮고, 그런데 요새는 문제가 많아서 친자 확인 진찰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가만히 보니 내 아들 같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 검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 ....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엄청난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본받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본받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거기에 유전학적으로 닮은 것이 있고, 의식적으로 본받는 것이 있거든요. 거기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발가락도 닮고, 손가락도 닮고, 얼굴도 닮았는데, 그런데 마음이 안 닮았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식을 두고 흔히 그러지요 “내가 겉을 낳았지 속을 낳았나?” 보면 속은 아니더라. 이것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의 본분입니다. 자녀가 되었으면 부모를 닮아야 합니다. 그래서 완전한 자녀입니다. 몸은 그 집에서 태어났는데 생각은 별도입니다. 그러면 그때 가서 부모가 뭐라고 합니까? “저건 내 자식이 아니다” 하지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부모의 모든 신앙을 물려받아야 그 자녀입니다. 부모의 신앙철학을 부여 받고 이어가야 자녀입니다. 그런 점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을 본받는다. 그런데 본받는다는 말을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받으라.” 말씀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 하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뜻이 옳다고, 인정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벌써 절반은 본받는 것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그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생활에 옮겨 나갈 때 더욱 더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힘주어 말씀 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놀라운 말씀인데, 이어서 구체적으로 말씀 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 하신 것 같이 ”라고 합니다. 이제 또 “그리스도를 닮으라.” 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원리가 그것입니다. 그 다음에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으라, 합니다. 요13:34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 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 하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로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로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 사랑, 내가 사랑 받았다는 것 깨닫고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버리시고 대속 물로 주셨습니다.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마20:28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 물로 주려 하심이니라.”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사랑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참 사랑의 뿌리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사랑이란 사랑하는 자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다음은 그를 위한 희생입니다. 큰 희생, 내가 완전히 없어지는 희생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플러스알파가 있습니다. 기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랑은 희생을 기뻐합니다. 희생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희생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이렇게 버릴 수 있다는 것이 감사 합니다. 왜요? 우리가 그런 사랑을 이미 받았으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희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신앙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희생이 즐거움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가능하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 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합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바로 이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조금 희생하는 것,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히 있을 일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런고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 입니다. 3절에 “이는 선도의 마땅한 바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마땅한 바가 무엇 인고, 하니 3가지입니다. 첫째는 금지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5:3절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용과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바울이 이 글을 쓰고 있는 그 당시에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이 이교도들 사이에서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철저한 회개를 요구한 것입니다. 불의한 금지할 것 중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음행”입니다. 음행이란 불법적인 성 관계를 말합니다. 또한 “더러운 것”은 음행보다 더 광범위한 것을 말합니다. 음행이란 직접적인 행위를 말하고 있지만 더러운 것이란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음행을 자극하는 즉 더러운 영화나 그림, 또는 더러운 잡지 같은 음란에 기초를 둔 것 등을 말합니다. “탐욕”이란 마음속에 자기 분수를 넘어서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다 일반적이 욕심이 있기 마련입니다. 재물을 갖고 싶은 마음, 지위를 얻고 싶은 마음, 명예를 얻고 싶은 욕심, 더 좋은 옷을 입고 싶고, 더 좋은 곳에서 살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의 분수에 맞는 것이라면 그것은 탐욕이 아닙니다. 탐욕이란 취하면 취할수록 더 갖고 싶어 하며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욕심을 말합니다. 두 번째 오히려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더 극치는 감사입니다. 이런 일에도 감사하고 저런 일에도 감사합니다. 5:4절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앞 절에서 생활 태도에 관한 교훈을 하던 바울이 본 절에서는 언사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성도로서 마땅히 않는 말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그 첫째가 “누추한 말”입니다. 누추한 말은 깨끗하지 아니하고 아름답지 못하며 아주 속된 말을 가르칩니다. 둘째로 “어리석은 말”입니다. 어리석은 말이란 사리에 맞지 않고 분수에도 맞지 않는 말을 가리킵니다. 셋째로 “희롱의 말”입니다. 희롱의 말이란 남을 조롱 하고 박대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 이 세 가지 말이 마땅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말”을 하라고 합니다. 감사의 말이란 남의 은혜와 친절에 보답해 주는 말이고, 격려해 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말에 있어 마땅히 누추하고 어리석고 희롱의 말을 버리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성결입니다. 깨끗하고 정결하게 할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5:5절에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본문은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얻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이미 그 마음의 양심으로부터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의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나 곧 “우상숭배자”는 모두 그러한 생활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의 기업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다 물질을 더 탐하면 그 물질이 우상이 되고, 하나님 보다 명예와 권력을 더 사랑 하면 그 명예와 권력이 우상이 됩니다. 여기 보면 탐심이 곧 우상숭배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과거에는 그런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 들이자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는 성령님이 거하게 된 것입니다. 허지만 우리는 간혹 마귀의 유혹에 빠져 이런 더러운 곳에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역사로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견딜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곧장 회개하고 그런 생활을 박차버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분명히 성령이 없고, 그 사람이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는 한 버림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얻지 못할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중생하고 새 사람이 되어 죄와 상관이 없게 된 성도로서 위의 세 가지 죄악에 대해 행동은, 물론 입에라도 담지 않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인 동시에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으로 속이지 못하게 하라” 합니다. 잘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속습니다. 세속주의에 속고 쾌락주의에 속습니다. 5:6절에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헛된 말”이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심을, 가져도 괜찮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예수 믿을 때 예수의 피로 죄 사함 받았으니, 괜찮다고 거짓으로 속입니다. 불신앙의 이방인들이나 혹은 교회의 거짓교사 중에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러한 행위가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음행이나, 더러운 것, 또는 우상 숭배를 해도 천국에 갈수 있다고 하는 말에 속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간교한 말로 다가옵니다. 어떤 때는 천사를 가장하여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굳건히 서서 이것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말씀인지, 아니면 마귀의 거짓교리 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습니다. 7절에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 말은 이방인들이 저지르는 죄에 함께 참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받을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말끔히 씻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자칫 잘못하면 이런 사람들에게 유혹을 받아 함께 참예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에 큰 손실을 입고 하나님께서 때리시는 매를 맞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과 아주 떠나서 상종을 하지 않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고전5:10). 그러므로 음행하고, 더럽고, 탐하며,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함께 살기는 살되, 그들에게 물이 들어서 그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고, 끊임없이 말씀위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고전12:32,3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속지 말라 “이 세상뿐이다”하는 말에 “속지 말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하는 헛된 소리에 속지 말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쾌락주의에 속지 말고, 정결해서 저 내세를 지향하면서 성결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면, 이제 우리가 금지해야 할 일이 있고, 늘 감사해야 되겠고, 그리고 성결해야 되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의 문호『괴테』는 하도 유명하고 하니까, 그 저택도 좋고 해서 늘 많은 손님들이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괴테의 집에서 파티를 할 때가 많았습니다. 특별히 정치가며 문학가며 유명한 사람들이 초청 받아서 파티를 할 때가 있었는데, 어느 때 그런 파티에서 괴테가 가만히 들어 본즉, 파티 중에 주고받는 말들이 아주 좋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더러운 말도 있고, 남 흉보는 소리도 있고, 비꼬는 소리도 있고···, 괴테가 참다못하여 한마디 했습니다. “음식은 여기에 엎질러도 좋고, 우리 집을 다 더럽혀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발 더러운 말만은 하지 마세요. 남을 비난하거나 욕설 같은 말은 입 밖에도 내 놓지 말아 주세요. 그것은 우리 집 집 공기를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가정 분위기, 가정 공기를 더럽히는 그런 깨끗하지 못한 행동이나 말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했으면 정결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 된 정체가 확실하면 용기 있게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세상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