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2:19-22ㅣ 김남수 목사]
아이가 혼자 제방에서 장난감 벽돌을 가지고 이것을 높이 쌓으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돌아와 이 아이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관심을 보이느라고 아이가 하고 있는 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벽돌 쌓기를 하고 있는 아이를 보고,“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니?”하고 물어보았습니다.
했더니 이 아이가 뒤돌아보면서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댑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아빠. 지금 교회를 짓고 있어요.”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늘 이 어린 것을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교회에 갔을 때마다 떠들어서 조용히 하라고 주의시킬 정도로 이 아이는 말썽이었는데, 이만큼 믿음이 생겼구나 싶은 것이 자못 대견스러워서 한마디 더 물었습니다.
“얘야, 교회에서는 왜 조용히 해야 하느냐?”아이의 대답은 뜻밖이고 걸작이었습니다.
“아빠도 참, 교회에서는 조용히 해야지요. 사람들이 다 잠들었으니까요. 떠들면 모두 깨잖아요.”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가기까지는 좋았는데 갔을 때마다 아버지는 잤거든요.
존 것이 아니라 잤습니다.
아이는 이걸 보았으니 이런 대답을 할 수 밖에요.
교회는 가서 조용히 자는 곳이다. 그러니 떠들지 말아야 한다 하고 생각해 온 것입니다.
이 기막힌 이야기가 아닙니까?문제는 내가 가진 교회관이 어떠냐, 입니다.도대체 여러분은 교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모든 생활 중에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만큼입니까?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전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성전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요, 성전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서로 만나는 하나님의 가정, God's family - 가정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요.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사람들의 모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입니다
이러므로 바울은 교회를 첫째 하나님의 가정이요, 둘째 성전이라고 합니다.
I.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교회 (엡 2:19)
사도 바울은 이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19절에 교회는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oijkei'oi tou' qeou' 인데, members of the family of God, 즉 God's family.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그 자녀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모두 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들이 먼저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가 그 뒤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식사기도를 할 때마다 먼저 믿는 아들이 기도를 합니다.
몇 주일 교회에 나온 아버지가 자기가 좀 기도를 하고 싶었습니다.
“야 이놈아. 나도 좀 기도하자.”아들이 썩 기분이 좋았습니다.“그러시지요. 아버지께서 기도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버지가 식사기도를 하세요.”
아버지가 기도를 시작하는데. 이런! “하나님 형님이시여…”하고 말문을 여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아들이 “아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이라고 하셔야 됩니다.” 하고 아버지를 일깨웁니다.
그랬더니, 아버지 왈 “야 이놈아. 너는 족보도 모르느냐. 네게 아버지면 내겐 형님이지.”라고 대꾸하는 것이었습니다.
족보 가리다가 이런 난센스가 빚어졌는데, 아무튼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들, 손자, 며느리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다 아버지이십니다.
그야말로 평등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곳이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또, 교회는 성령 안에서 모입니다.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이나, 초대교회에 있었던 문서 중에 보면, 성령을 상징적으로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또는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성령을 어머니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는 사람이 교인이다 하였습니다.
교회가 분명 어머니입니다.초대교회 시대는 성령론이 곧 교회론 이었습니다.
성령론과 교회론이 일치하였습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어려서는 젖을 먹고 좀 큰 다음에는 밥도 먹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교회에서 교육 받고, 여기서 훈련 받습니다.
봉사합니다. 그 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성령을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그런 고전 문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성령을 어머니와 같이,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그러면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의 자녀니까, 서로 형제다, 다 같이 형제자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이방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사람을 개같이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방사람에 대해서도 뭐라 말씀하는 고 하니,“이제부터는 너희가 외인은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9절)“고 합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오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다 같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서 똑같은 멤버십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성격입니다.입은 옷으로도 차별이 안 되고, 외모로 차별해도 안 되고, 사회적 신분도 교회에서는 아무런 구실이 못됩니다.
어느 누구도 다 똑같습니다.이방사람까지도 다 똑같이 이렇게 한 가족이 된다, 이것이 교회다 하는 말씀입니다.
II.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 (엡2:20-22)
사도 바울은 이제 두 번째로 성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교회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는 교회는 건물, 특히 성전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20-22절에서 성전에 대한 그의 비전을 말하면서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이에 관해 우리는 세심한 연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이미지를 전개하면서 성전건물의 기초와, 모퉁이돌, 전체 및 개별적인 돌들로서의 구조물, 그 응집력과 성장 등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첫째, 먼저는 집에는 집터가 있습니다. 터, 기초는 매우 중요합니다.
20절에 터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들이라”합니다.
“사도” - 우리가 지금 직선적으로 말하면 이는 사도신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수님 믿는 신앙이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사도들이 증거 해 준 바로부터 옵니다.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증거 해 준 내용이 전승되어 우리가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사도신경을 외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이것이 우리 신앙의 터요, 기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이단 여부를 가늠할 때는, 사도신경을 그대로 믿느냐 변질시켰느냐를 가장 확실한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사도신경, 이 고백을 똑같이 한다면 교파는 다르더라도 다 같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면 이단입니다.
신천지 같은 이단은 사도신경을 부인합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신천지는 이만희라는 교주의 가르침에 의해 세워진 사이비집단 입니다.
구원파나 신천지 등, 이런 유는 기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집짓는 자들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셨으며 이를 통해 반석의 필요성을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반석 위에 세워졌는가?
바울은 이에 대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대답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모두 가르치는 역할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의 기초를 구성하는 것은 명백히 그들의 인격이 아니고, 그들의 가르침, 교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들을 영감 받은 교사들로, 신적계시의 전달자들로, 신적권위를 떠맡은 자들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사도들”이란 이 용어는 선교사들, 교회의 개척자들, 감독들, 교회의 지도자들을 절대 총칭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신사도운동이니 하면서 와그너는 사도들을 임명하고 있고, 한국의 어떤 치유사역을 하는 장로는 자기가 사도들을 임명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이나 행위는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라는 이 용어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사, 그의 이름으로 가르치도록 권위를 부여하셨으며, 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열 두 사도들과 바울, 야고보, 그리고 아마도 몇몇의 작은 특수한 몇 분들로 구성된 사람들을 의미함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친 것을 교회가 믿고, 보존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또한, ‘선지자들’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신실하게 전달하는 영감 받은 교사들을 가리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는 두 명칭은 구약선지자들과 신약사도들이 모두 교회의 가르침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시사해줍니다.
실제적인 의미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이 사실은, 교회가 신구약성경을 기초로 하여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쓴 성경이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문서들입니다.
그러므로 기초가 일단 놓여지고, 그 위에 건축물이 세워지고 나면, 함부로 건물을 변경할 수 없듯이, 신약교회라는 기초도 침해될 수 없고, 또한 오늘날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제공한 어떠한 것들에 의해서도 가감되거나 변경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셨고, 또한 현재 신구약성경에 기록 보존 되어 있는 진리들을 성실하게 따르고 있는가에 따라,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둘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셨다 하는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는 두 벽이 있고, 두 벽이 한 모서리로 와서 만납니다.
두 벽이 서로 만나는 그 곳에 큰 기둥이 있고, 그 기둥 밑에 돌이 있습니다.
이 돌이 바로 모퉁이 돌입니다.
아주 중요합니다.이것이 흔들리면 집은 통째로 무너집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큰 육중한 모퉁이 돌이 있습니다.
『 아미테이지 로빈슨 』은 성전남쪽 담으로부터 출토된 길이 12m의 고대의 한 거석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본문 19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이 말씀에서, 바울은 성전이 지어져가는 하나의 단일체로서 함께 응집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모든 구조가 함께 결합되고, 또한 이루어져가는 주된 것은 모퉁이 돌이기 때문입니다.
건물의 강도와 그 중추는 그 건물이 모퉁이 돌에 얼마나 확고하게 결속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듯이,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의 연합과 성장에 필요불가결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계속적으로 확고하게 그리스도에 연결되어있지 않는 한 교회의 일치는 와해되고, 성장은 빗나갈 것입니다.
고전 3:11에 보면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 전해진 말씀과 아울러 살아계신 그리스도, 생명으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교회의 성격은 이렇게 전해진 교훈과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Living Christ,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그리스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이것이 교회의 기초 반석이 됩니다.
세 번째, 본문은 21절에 “서로 연결하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모퉁이 돌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방사람과 유대사람이 만납니다.검은 사람과 황색 사람 흰 사람이 만납니다.
누구든지, 어떤 민족이든지, 여기서 만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여기서 화합과 화해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이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카고 근교에 있는 미국에서 큰 교회 중에 하나인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 이 교회는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담임하고 계시는데, 휫튼 칼리지 조직신학 교수의 조력이 있었습니다.
이 교수는 교회의 성전을 보면서 “이것이 교회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쓴 책이 『 Rediscovering Church 』인데 이 책의 서문에서 “이것이 교회다” 어떤 것이 교회냐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교수는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를 보고 의사가 조용히 말합니다.
“당신의 남편은 죽었습니다.”의사의 이 소리는 조용하지마는 그 아내의 귀에는 이것이 청천벽력 같이 기절할 정도입니다.
그 때 바로 옆에 있던 한 교인이 그녀를 끌어안습니다.
“우리 같이 이 고통을 이깁시다. 신앙으로 이깁시다.”하고 위로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이 모임, 저 모임에 같이 참여합니다.
거기서 그녀가 은혜 받고,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고, 다시 용기를 얻습니다.
이를 보고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이것이 교회다”라고 생각합니다.
한 예를 더 들면,어떤 사람은 고독해서 우울증에 빠졌다가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아서 치유가 됩니다.
이를 보고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이것이 교회다”라고 합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교회가 치유의 효과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의 지상생애 기간의 약 40%를 치유하시는 데 시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고 교회에 병든 자가 있으면, “그는 장로들을 청하여 죄를 서로 고백하고,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교회는 영적으로 치유 받고, 정신적으로 치유 받고, 몸도 치유 받고, 가정도 치유 받아 건강해야 합니다.
교회라는 곳이 말씀만을 전하고, 배우고 하는 강의기관이 아닙니다.
문제는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리고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 갔다 집에 와서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사랑스럽고, 남편을 보면 정신이 나갈 정도로 사랑스럽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 갔다 집에 와서는 남편 보고, “에휴 저 원수 저거…” 이렇게 되면, 이는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중생이 이루어져 심령이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해 놓은 일인 죄와 문제들 병이 치유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마치 교회는 건축물이 지어져가는 것과 같습니다.
건물에는 여러 구조물의 기능이 각각 있습니다.
기둥도 있고, 서까래도 있고, 벽도 있고, 유리도 있습니다.
저마다 제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어느 때에 어느 기둥 하나가 “나 오래 서 있다가 피곤한데 앉았다가 일어날까 보다.”하고 잠깐 앉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것이 다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두 다 교인이고, 집사고, 장로고, 권사고, 찬양대원이고, 교회학교 선생이고, 이 모두가 제 위치에서 제 구실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 은사로 연결해서, 화합하고 서로 봉사하므로 제 기능을 다하여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이것이 교회입니다.
네 번째, 또 하나 중요하게 말씀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역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에는 말씀이 있고, 성령이 계셔서 교회입니다.교회? - 말씀과 성령,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그러면 교회입니다.
성령이 역사해서 중생하는 역사가 있고, 성화하는 역사가 있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환자가 치유 받고 일어나는 곳,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또한 모두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할 때, 그들은 오히려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번째, 이제 중요한 말씀이 결론으로 남았습니다.
본문 22절에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합니다.
이제 교인도 있고, 건물도 있습니다.말씀도 있고, 성령도 역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있는 우리의 개인 성전, 이 성전 하나하나가 아직 덜 지어졌습니다.
온전한 중생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 받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종종 낙심을 하다가도 이런 생각을 하면, 저는 용기를 얻습니다.
누구나 실수가 많습니다.
특별히 성격적으로 실수하기도 하고, 말에 실수도 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도 그 많은 날 그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지마는 많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계속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22절에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서로 서로 격려하면서 - 여기에 교회론 적, 공동체의 의미가 있습니다.
나 혼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모여서 기도하고, 같이 찬송하고, 서로 봉사하면서, 서로 서로 협력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만큼 거룩합니까?
얼마만큼 온전한 교회라고 생각합니까?
가끔 어떤 성도님들이 예봄교회 걱정을 합니다.
“저도 잘 압니다. 다 죄인들이 모인 곳인데 오죽하겠습니까? 조금 참읍시다.” 기다릴 것입니다.
많은 죄인들이 모여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갑니다.
개인적으로도 변화되고, 가정적으로도 변화되고, 크게 말해서 교인 적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교회로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 있습니다.
어디까지 왔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이제,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교회 안에 충만하시고,
누가 찾아와도 여기 와서는 은혜 받고,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중생하여 성화되고,
환자가 전인이 치유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으로 이렇게 나타나게 될 수 있도록,
그런 교회가 되고,
먼저 믿는 교인들이 그렇게 되어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