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1:15-19 ㅣ 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에는 바울 사도의 에베소 성도들을 향한 기도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어째서 그 서신서 들 중에 기도문을 썼는가 하는 점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노라”하고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내용을 편지에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쓴 깊은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묻는다면 “기도하는 사람이다”고 서슴없이 대답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도 “기도생활”이라 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기도문이 열려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또 잘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자세로 기도하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자세가 바로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마 6: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사람도 기도하거든요.
그들도 나름대로 중얼중얼하는데 그들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마6:31-32)하십니다.
적어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는 수준이라면 예수님께서 평가하실 때 아직도 그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이 점을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자세, 기도의 수준, 기도의 격이, 바로 그 사람의 신앙수준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 말씀하실 때도 “이곳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잘 믿는 사람은 기도의 행복을 느끼고 안 사람이요, 기도하지 않고는 못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기도가 열려야 합니다.
기도에 푹 빠져서 신비로운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수준급 기독교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에베소서 만에도 기도문이 3번 있는 것을 비롯하여, 다른 서신에도 종종 기도문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기도인데 왜 기도문을 썼겠습니까?
여러분도 편지할 때 종종 그렇게 하지요?
기도문을 안 쓰신 분들은 앞으로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에게 편지할 때 종종 그렇게 기도문을 쓰세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너 잘 있느냐, 뭘 했느냐, 애인하고 잘 지내느냐?…그런 소리 하지 말고, 난 이렇게 널 위해 기도하노라”하고 기도를 쓰세요.
왜요? 기도문을 썼다는 것이 뭐냐 하면 신령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 중 최고의 사랑이 “난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바울은 기도 내용을 말씀합니다.
이러 이렇게 소원한다. 내 소원이 이것이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니 너희도 이렇게 힘쓰라. 그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내용과 저희가 힘쓰는 내용이 정반대가 되면 안 되지요. 같은 방향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소원이니, 너희도 이렇게 이런 방향으로 힘쓰며 살아가기를 바란다함입니다.
좀 더 중요한 문제가 또 있습니다.
기도가 하나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 기도와 너희 기도가 하나 되기를 바란다함입니다.
가정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지요.
한 목사님 가정에서 어머니는 아들이 목사가 무조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기술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 앞에 아들이 기술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고, 어머니는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쪽을 들어주셔야 되겠습니까?
양쪽 다 열심히 기도하는데요. 그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모름지기 기도는 하나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힘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각인각색으로 기도하면 안 됩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한다.
그런고로 너희도 이렇게 기도하라.
우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있지마는 내 기도와 너희 기도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도록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내용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또한, 기도하는 마음에 대하여 우리는 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본문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5,16절에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분위기를 말씀하는 것인데, 여러분 답답한 일이 있어서 기도할 때 그것도 하나님께서 들으시지마는 그 기도가 그렇게 큰 힘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위대한 기도는 감사하면서 하는 기도입니다.
빌4:6에 보면 “감사함으로 아뢰라”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한다“고 합니다.
대학교 때 로스 선교사님께서 저를 서양 선교사님들의 기도모임에 데리고 가곤 하셨는데, 그때 서양 선교사님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밝게 웃으면서 찬양하고 감사하며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 교인들은 얼굴이 울상이고 죽을상이지요.
열심히 기도하지만 당최 보기가 민망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실 때 민망하지 않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원망하고 심지어는 주먹질하고, 패고, 말로 할 수 없는 온갖 별 짓을 다합니다.
그래가지고서야 하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겠습니까?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내 마음이 기쁘다, 그래서 내가 감사하면서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할 마음이 있다.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도의 분위기입니다.
기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기도의 대상에 대해서도 특별한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1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 -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아버지에 관해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 하셨습니다.
엄격히 따져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굳이 서열로 따지면 예수님만이 진짜 아들이고 우리는 양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해서 우리가 그 공로를 믿고 그 의를 믿음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아버지, 예수님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 앞에 우리가 나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19절까지의 기도제목을 보면, 특별한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뭘 해달라는 얘기가 없습니다.
바울사도 기도의 특별한 것은 “내 마음을 바꾸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합시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제목은 언제나 세상입니다. 나라를 어떻게 하고, 세상이 어떻고, 나는 부동자세이면서 가정이 어떻고, 남편이 어떻고, 자녀가 어떻고, 누가 어떻고, 어떻고, ….전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들만 말합니다.
기도의 자세와 내용, 기도하는 짓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예뻐하시고 웃으시면서 응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닌데, 나는 부동자세이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만 말하고, 그저 자기 자신은 온갖 별 짓을 다 하며 기도합니다.
이것이 모두 다 생각해보면 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참 너는 지금 잘하고 있다.”하시고 웃으시면서 응답하시겠습니까?
“너는 참 사랑이 많고 겸손하구나.”
“참 너는 아는 것도 많다.” “아니, 내가 해야 할 일만을 네가 다 말하고, 나를 가르치고 있구나.”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기도는 잘못된 기도입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어떤 때는 한 가지라도 빼놓았을까봐, 빼놓고 가다가는 가다말고 또 기도합니다. 아까는 빠뜨렸는데 그것마저 해야지 합니다. 이거 안 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총체적으로 하시는 말씀의 내용은
“나를 움직여주십시오. 나에게 알도록 해주십시오.”하는 내용입니다.
나 자신을 변화시켜 주십사하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17절에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풍성히 부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영, 그리고 계시의 영을 주십시오.
이것이 첫 번째 기도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오시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성경을 잘 이해하고, 하나님 나라를 잘 깨닫게 되는 지혜를 주시며, 하나님 나라의 지식의 비밀을 계시하여 주십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라는 말은 간단히 말하면, 성령 충만하게 하옵소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있되 충만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성령의 감동한 자만이 비로소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적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 받는 사람이, 기름부음 받은 자가 곧 그리스도인입니다.그래서 사도바울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왜요? 하나님을 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니까요.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다.” 유명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나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나도 모릅니다.
그런고로 “계시의 영을 주사 날마다 하나님을 알게 해주세요. 더 밝히 알게 해주세요. 그리할 때 나도 알고, 세상도 알고, 내가 해야 할 일도 알고 다 알게 될 것이니까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눈을 밝혀 주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다 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은 눈으로 봅니다. 눈을 뜨면 보는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못 봅니다.
그런데 눈 뜬다고 다 봅니까?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빛이 있어야 보지요. 빛이 없으면 못 봅니다.
깜깜한 칠흑 같은 밤에는 볼 수 없습니다.요는 빛입니다.
우리 눈이 아무리 밝다 해도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눈을 밝혀 주십시오. 빛을 비쳐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춰주지 아니하면 우리의 눈은 무효입니다.우리의 지혜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많은 지식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빛을 비춰주셔야만, 비로소 우리가 밝히 만물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마음눈은 영안입니다.
아담 이후 인간이 타락하자 죄와 정욕과 교만 등으로 영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이제 주께서 하늘의 빛, 성령의 빛을 비춰주실 때 우리는 밝게 보게 되는데,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는 고 하니, 마음눈을 밝혀주셔서, 즉 영안을 밝혀주셔서 나로 하여금 알게 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말과 ’본다.‘.는 말이 헬라어에서는 “에이도(ei[dw)”로 같습니다.
영어에서도 “See"라고 하는 말이 ‘본다’는 말이지만, ‘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눈을 밝히사 보게 해주세요, 알게 해주세요. 그런 말입니다.
그럼 무엇을 알게 해달라느냐 하면,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마음눈이 밝아야 볼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영안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보면, 다 아름답게 보입니다.
우리 마음에 빛이 있어서 사랑으로 충만하고 은혜로 충만하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예수님 믿고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할 때, 예수님 믿기 전에는 그냥 무심코 지나갔는데 흙에서 돋아난 연한 풀 한포기를 보아도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아름답고 생명의 신비에 도취됩니다.
장미꽃과 채소를 봐도 똑같은 땅에서 돋아나오는데, 장미꽃잎은 저렇게 빨갛게 아름답고, 채소는 연한 초록색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볼 때 신비하고 저절로 감탄케 됩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얼마나 불행했습니까?
장님이요, 귀머거리요, 벙어리로 한 평생을 살았는데 세상 떠날 때는 “나의 일생은 참으로 아름다웠다.”하고 갔습니다.
그 마음의 빛이 아름다우니까, 밝으니까, 그렇게 한 평생을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눈이 어두우면 모두가 적으로 보이고 지배하려고만 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주는 마음아 아니라, 교만한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야! 이 밝은 성령의 빛을 받아서 우리가 밝히 보겠는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에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 기업, 소망, 능력 이 세 가지가 핵심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보게 해주세요. 알게 해 주세요. 라고 바울은 기도했습니다.
먼저, 부르심의 소망 - 이것은 미래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볼 줄 알아야합니다.
다음이 무엇인가? 다음에 있을 것이 무엇인가? 미래를 볼 줄 알아야합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랑스 어떤 학생 하나가 법과대학 졸업반에 다니는데, 이제 마지막 학기가 되었습니다. 학비가 모자라서 신부님을 찾아가 부탁을 합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좋은 일에 쓰라고 갖다 주었는데, "이건 자네를 위해서 보내준 거로구만.”하면서 신부는 뜻밖에도 돈 한 뭉치를 선뜻 내주는 것입니다.
너무도 쉽게 소원이 이루어지고 보니 당황했는데 “가지고 가라”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문밖을 나서는데 신부는 “잠깐만”하고 학생을 불러 세웁니다.
“자네 그것으로 무엇을 할 건가?” “아, 물론 가져다가 등록금을 내야지요.”
“그러고는 무엇을 할 건가?” “공부 해야지요.”“공부해서 무얼 할 건가?” “법과대학을 마치겠습니다.”
“그 다음은?” “변호사가 되겠습니다.”
“그 다음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변호하겠습니다. 장가가겠습니다. 돈 벌겠습니다.”
“그 다음은?” 이제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신부가 껄껄 웃으면서, “그 다음은 내가 말하지, 자네도 죽어야 되네. 가봐” 그랬다고 합니다.
학생이 그 돈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다음은.” 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그래서 그는 돈을 내던지고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수도사가 되고,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의 묘비명으로 그 좌우명을 쓰게 했습니다.
“그 다음, 그 다음, 그 다음“ 이라고.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요새 공부 안하고 게임만 즐기는 학생을 보십시오.
그 다음은 몰라서 그렇습니다.
저렇게 되면, 저거 얼마 있다가 울게 되지 않겠어요?
기가 막히지요.가슴을 쳐도 도리가 없지요.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다음, 그 다음, 그 다음…이 부르심의 소망,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된 미래, 신령한 영적인 축복, 이것을 봐야지요.
이것만 보여 지면 문제가 없습니다.
어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 복잡한 문제가 많은 것 같으나, 이 미래에 대한 소망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시시한 것에 매여서 울고불고 야단하는 것입니다.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두 번째는 기업 -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의 기업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성도가 차지할 기업은 영광이 풍성합니다.
이것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 풍성한 것,스데반을 보십시오.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향하여,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돌에 맞아 순교할 때 하늘의 기업을 바라봅니다.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니, 얼굴이 천사와 같아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왜 문제가 되었습니까?
그에게 주어진 기업의 땅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망하다 광야에서 다 망했습니다.
기업을 바라보고 눈앞에 환히 바라보고 살면, 오늘 좀 고생이 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기업, 이것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또 세 번째 능력 - 어떤 능력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힘의 능력, 그리스도께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힘보다 훨씬 위대한 능력으로 우리의 소망을 방해하는 것이 없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사모하며,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동행할 때 해도 중천에 머물게 하고, 홍해를 가르기도 하며, 비가 오게도 멈추게도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 이 엄청난 능력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능력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베푸시는 능력을 따라서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우리도 그리스도의 능력, 예수님을 믿어서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고, 병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는….이런 간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이 능력이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게 주어진 능력을 내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 있는 문제가 하나도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마음눈을 밝혀서 우리 앞에 있는 소망, 기업, 능력을 알게 해주십시오.”라고.
아무리 좋은 복을 받았을지라도 그 복이 어떻게 훌륭한지 모르면, 그 복이 귀한 줄 모르면, 그 복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영의 눈을 밝혀서,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고, 우리 앞에 있는 소망, 기업, 능력, 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나머지 문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도 바울이 기도한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