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5:1-10 ㅣ 김남수 목사]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삽니다.
그런데 세상에 비극이 있다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사랑을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고, 사랑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 사랑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 하나님의 생명을 얻습니다.”(요3:16)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믿으면 구원받아 영생을 얻습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전세가 불리해서 뒤로 물러섰습니다.작전이란 후퇴할 때 제일 어렵습니다.
후퇴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총에 맞았습니다.
뒤에서 쏘는 총에 맞아 지금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고 쓰러져 있습니다.
후퇴를 먼저 한 사람들이 보니까 저 뒤에 쓰러져 손을 들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 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합니다.
그때 그의 사랑하는 친구 하나가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데, 뚫고 들어가 저 친구를 구출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 입니다.
소대장이 말합니다.
“이미 총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렸고, 저 사람은 살지 못한다. 너까지 거기 들어가서 죽을 것이 없지 않느냐. 가지마라”
그러나 이 청년은 쓰러져 있는 친구를 버려둔 채 그냥 올 수가 없어서 기어이 달려 들어가서 그 친구를 업고 나옵니다. 업힌 친구는 귀에다 대고 자기를 업고 가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올 줄 알았다. 나는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행복하다. 나는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
그리고 숨졌습니다.그 시체를 업고 와서 내려놓을 때 소대장이 말했습니다.
“거 봐라 어차피 죽을 사람 살리려고 덤비다가 너까지 죽을 뻔 했잖느냐”이 친구는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내 친구는 내 등에 업혀서 네가 올 줄 알았다.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하고 죽었습니다.
여러분. 참 사랑, 위대한 사랑에 감격하면 고생이다, 질병이다, 문제가 되지 않고, 죽음까지도 넉넉하게 넘어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거짓된 사랑이 문제인 것입니다.
거짓된 사랑이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고, 참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랑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사랑의 소통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단절됩니다.
또한 요새 사람들의 사랑은 이기적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선교사님의 아들이 어느 교회의 권사님의 딸과 사랑해서 결혼시키려고 한국에 나왔는데, 그 권사님이 결혼 후 살 집이 없으니, 내 딸과 결혼 할 수 없다고 해서 결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사랑은 너무도 이기적입니다.
이를 보고 저는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게 하시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너무 깊고 높아서 어두워진 인간이 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은 것입니다
I. 사랑은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사랑을 모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르는 이유는 심령이 어두워졌는데 회개하지 않는 죄 때문입니다.
어쩌면 매일매일 특별한 사랑 속에 살면서도 사랑을 모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고독하고, 욕구불만 가운데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비난 가운데 살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이요, 오늘날 인간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문제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이해하고 사랑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사랑의 대화가 “된다.” “안 된다.” 하는데 사랑의 communication처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분명히 사랑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합니까?
또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사랑의 언어처럼 힘든 것이 없습니다.
사랑의 대화가 안 되기 때문에 사랑의 언어소통의 단절, 이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분명히 사랑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사랑의 언어, 소통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이 없습니다.
감사도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이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 자녀 과외 시키는 열심을 보면 세계최고 입니다.
그런데 자녀 사랑을 표현할 줄을 잘 모릅니다.
사랑의 언어를 모릅니다.
사랑한다 하면서 자녀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괴롭힙니다.
오늘날 어린 학생들이 이 스트레스를 못 이겨 자살까지 합니다.
사랑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눈높이 사랑을 해야 합니다.
특히, 자녀를 교육할 때 부모의 주장이나 중심으로 다른 애들과 비교해서 더 잘 하도록 할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재능 자녀가 좋아하는 달란트를 발견하여, 그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칭찬하며 격려해 주고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을 느끼고 믿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는, 사랑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희생을 해야 합니다.
희생을 통해서만 사랑이 믿어지니까요.다음, 사랑받는 입장에서는 겸손해야 됩니다.
아주 겸손해야만 사랑의 언어가 들립니다.
겸손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시련이 있고, 고통이 있고, 역경이 있고, 환난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낮추십니다.낮추시고, 낮추시고, 계속 낮추십니다.
그래서 발바닥에 닿을 때까지 낮아진 다음에야, 거기서 진실을 찾고, 비로소 사랑이 들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고맙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이해하고 믿으려면 성령이 마음을 열어 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 성령이 우리 마음을 열어 줘야 이 사랑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반대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지기 시작하고, 굳어지기 시작하면, 어떤 사건을 통해서도 점점 악해집니다. 점점 굳어집니다.사랑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투쟁뿐이요 싸움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마음 문을 열 때는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사랑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II. 사랑의 확증
사랑에는 확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게 하기 위해 사랑의 확증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확증을 통해 받아들여 믿고 있습니까?
어떤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고 있습니까?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랑의 확증 가운데 가장 선하고 온전한 최고의 확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오늘 본문에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돈 보따리나 한 보따리 주실 것이지, 2000년 전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이것을 바라보라!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고 오늘날도 말씀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를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계시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내용은 자기희생입니다.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죽으신 보혈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희생,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모두 옮겨 대신 우리 죄 값을 담당하게 하심으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씻어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원수인 인간의 모든 죄를 속량해 놓으신 것입니다.
사랑은 지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갚아야 할 값을 대신 갚으신 것입니다.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요19:30에 “다 이루었다”는 헬라어는 “테텔레스타이”인데, “빚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우리가 갚아야 할 죄의 빚을 예수님께서 대신 다 갚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병을 짊어지시고 채찍에 맞아 대신 아픔을 당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병을 다 치유해 놓으신 것입니다.(벧전 2:24)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뿐만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다 받으신 것입니다.(갈 3:13)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모든 죄와 질병, 모든 저주와 가난에서 온전하게 속량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속량의 사랑의 확증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과 화목 되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속량을 믿음으로 치유 받아 건강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량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마귀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큰 사랑과 은혜를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 희생의 사랑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사랑의 언어가 소통될 때, 비로소 사랑의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III.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자세히 봅시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확증해 주셨습니까?
본문 6절에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우리가 연약할 때” - 즉 병들어 약하고, 실패하여 일어 설 힘도 없을 때,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아들의 십자가로 확증해 주셨습니다.
또한,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 즉 내 마음과 고집대로 온갖 죄를 다 짓고 다닐 때, 하나님께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그 아들의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놓으시고, 용서해 놓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임이니라.“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원수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분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원수 같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 사랑이 기본입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수였을 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가 마귀의 자녀였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이러한 속성의 사랑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일이 너무 많았는데, 곁길로 갈 때도 많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 할 때도 많고, 그 많은 은혜 가운데서 사랑을 받고 살면서도 계속 잘못된 길로 갈 때도 많고, 거역할 때도 많았으니, 이것이 원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이 그 원수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뿌리요. 하나님의 원초적인 사랑입니다.
원수사랑은 사랑 못할 대상이 없습니다.
이 사랑은 원수를 사랑의 대상으로 바꾸어 사랑하고, 또한 그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다 그 사랑 받아 그렇지 않습니까?
또, 하나 있습니다.
주변의 이웃을 놓고 생각할 때, 주변에 있는 분들이 나를 하나님의 원수사랑, 그 높은 사랑으로 내가 오늘 여기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흔히 내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 입는 것만 생각하고, 내가 남에게 손해 끼친 것은 생각지 않습니다.
나를 피해자라고만 생각합니다. 내가 가해자라는 것은 잊어버립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5:44)
너희 원수 - 주관적인 원수개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원수요, 내 문제의 원수요, 나를 중심해서 원수요.내 사업과 하는 일에 원수요. ... 내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원수-이것은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나의 판단에 따라서 원수요, 내 권익에 따라서 원수요, 나의 판정에 따르면 저것이 원수다.
이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생각을 한 번 바꾸어 보십시오.
객관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저 사람이 내게는 원수이지만 착한 사람입니다.
어느 시간을 놓고는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일을 위해서는 좋은 사람입니다.
흑백논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까만색과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붉은 색도 있고 파란 색도 노란색도 있습니다.
내가 보는 대로 원수라고 해서, 그대로 원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원수니까 악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게는 나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는 소중한 사람일수록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헤르만 헷세(Hermann Hesse)는 여러분이 잘 아는 세계적인 소설가 입니다.
그의 저작 가운데 「어거스터스」(Augustus)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어거스트“라는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자, 한 노인 하나가 그 어머니를 찾아와서 말합니다.
“이 아기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기념으로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주겠소. 무슨 소원이든지 말하세요.”
그러면 그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지혜를 다해 곧 대답을 합니다.
“이 아기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정말로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많은 선생님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 평생 계속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만해졌습니다. 안하무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말년에 가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아주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늙은 몸으로 거지가 되어서 이곳저곳을 헤맵니다.
바로 이런 때에 다시 옛날의 그 노인이 나타납니다.
“당신이 너무 비참하니 이 시간에 소원을 한 가지 들어 주겠소. 내게 말하시오”
“어거스트”는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사랑은 받았으나 그는 사랑은 몰랐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했지 사랑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구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을 몰랐기에 문제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절망하고 욕구불만으로 불평불만 합니까?
무엇이 부족합니까?
결국은 사랑에 대한 지각이 없기 때문이요, 사랑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확증 -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받아들이면서 사랑이 이해가 되고, 사랑의 문이 열릴 때 모든 세계를 사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건을 사랑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 안에 나의 삶의 생명과 보람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