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5-22ㅣ김남수 목사]
어느 교회 한 신실한 여 집사님이 교회 나오지 않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꾸준히 권면하며 교회 함께 나가기를 권했습니다마는 남편은 쉽게 따라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아침, 남편이 느닷없이 “나 오늘 당신과 함께 교회에 나가려는데…”라고 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야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나보다 하고 서둘러서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갑니다. 가면서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오늘 목사님께서 무슨 설교를 하시나? 모처럼 가는데 어떤 본문을 보실까? 첫날이고 하니 바로 은혜 받아야 하겠는데 ……“ 이렇게 마음을 쓰면서 교회에 들어서 주보를 받아보니 본문이 무엇이냐 하면 창세기 5장이더라고요. 창세기 5장에는 사람들 이름만 나옵니다. 족보가 죽 나열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하필이면 이거라니”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아담은 930세를 살다 죽었고, 셋은 912세를 살다 죽었고, 에노스는 905세, 게난은 910세, 마할랄렐은 895세, 야렛은 962세, 그리고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고 죽었더라.……. 그런 이야기가 나열된 것입니다. 이거 어떡하나. 어떡하나 남편이 난생 처음 교회에 나왔는데 …. 좀 낙심되지마는 이 여 집사님은 여호수아서 1장6절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라” 스스로 이렇게 위로하면서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 남편이 “여보 나 등록합시다.”라고 말합니다. 등록용지를 찾아 써 내고, 다음 주일부터 교회 나오기로 작정했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래 집에 돌아와 음식을 잘 차려서 남편을 대접하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오늘 특별한 말씀을 들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나요?“ 남편은 차분하게 대답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하되, 대체로 많이 살기는 했더구먼. 그러나 죽었더라하는 말을 듣는 순간 “너도 죽어”하는 소리라 들리는 거야! 그런데 나는 죽을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거든, 그러니 내게는 구세주가 필요하지. 그래서 믿기로 했소. 합니다.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 겁니다.
심리학자들이 심층 분석을 하고 연구한 바로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걱정 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하나는 죽을까하는 걱정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엄연한 사실이 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죄의 걱정입니다. 죄에 대한 가책입니다. 죄 문제, 죽음과 죄 문제 이것이 근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먼저, 예수님에 관해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부터 진리를 배우고, 세계관을 배우고, 많은 귀한 교훈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겠다하고, 예수님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복도 받고, 출세도 하고, 성공도 얻고, 권력도 얻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무언가 내 소원을 이루어 보려고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몇 십 년을 교회에 나왔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중생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사람의 특징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지게 되고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경을 믿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설교 말씀을 들을 때,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 입니다. 중생하여 순간순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 출생, 출생이 중생이고, 그 다음에는 거듭거듭 태어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래서 전에 좋아 하던 것은 버리게 됩니다. 술 담배도 버리게 되고, 전에 좋아 하던 고스톱 골프도 버리게 되고, 전에 그렇게 좋아 하던 것 어느 사이에 하나씩 하나씩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중생 할 때는 목적이 변화되고, 생명력에 의해서 살고, 동기가 변하고, 삶에 의미가 바뀌어 집니다. 이것이 중생이고 성화하면서 가치관이 변합니다. 인격이 변하고 성품이 변합니다. 생활양식이 변합니다. 점점 그리스도화 되어 갑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에 나타난 특별히 “충만”이라는 말은 좀 더 특별한 말입니다.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은혜’적이라기보다는 ‘은사’적이라고 신학적으로 설명합니다. 역사적으로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이며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한 일이 있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네게 알게 한 것이다”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감화로 그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되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 그런 말씀입니다. 성령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 받으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도 베드로는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가 메시야 인 것을 압니다. 신앙을 고백했으나 성령 충만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옛 직업으로 돌아갔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할 때, 성령이 충만하게 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나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 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 충만한 몇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Ⅰ. 먼저 강합니다.
강하게 증거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을 담대히 증거 하는 것입니다. 입이 복음에 관해 열렸습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예수 믿고 누구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 한마디 못해 봤습니까? 그렇다면 그거 문제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병원에 입원하여 있을 때 심방을 갔습니다. 예수 믿은 지 40년이 된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병원에서 죽을 뻔하다. 살아났습니다. 그 때 그분이 고백합니다. 내 손을 붙들고 하는 말이 “제가 이렇게 죽음을 앞에 놓고 생각해 보니까 누구보고 예수 믿으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어요.“ “그럼 뭐라고 했는데요?” “교회 갑시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했어도 예수 믿으라는 말은 한 번도 못해봤다는 것입니다. “아! 이거 문제 있다.“ 하더라고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한국교회의 초창기에 열심히들 복음을 전할 때, 그 때의 구호가 있습니다. 그 때에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 그것입니다.
그때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인 채 필근 목사님이 버스를 탔는데 산정현교회 전도목사인 최 권능 목사님이 올라타더니 채 목사님 앞에 다가와 “예수 천당!”하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 잘 아는 터인지라 채 목사님이 당황하여 최 목사님보고 말합니다. “최 목사. 나야 나. 채 목사야. 나 채 목사라고. 나 몰라?” 했더니 최 권능 목사님은 “흥 벙어리구먼”하고는 아는 체도 않고 지나갔다 합니다. 그렇지요 벙어리 교인이지요. 전도 한 번도 못하는 목사가 목사면 무얼 합니까? 중요한 것은 성령 받은 사람은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든지 없든지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극치요, 성령 충만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Ⅱ. 성령 충만한 증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표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요.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제 영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영광 받으신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몸으로는 하늘에 계시지만, 영으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안에 계십니다. 이것을 의식 합니다. 그런고로 표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베드로는 오늘만 본 것이 아니라, 계속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따라 성전에 올라가면서 딱 만나는 순간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감동해서 “너는 왜 보고 그냥 지나가느냐?” 이것입니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 사람을 향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했더니 그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우러러 보며 추앙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일 따름이다 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쳐다보느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이 자리에 나타나셨느니라. 이렇게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함 입니다. 내 손으로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 주님께서 친히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신 것뿐이다. 지금 살아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의식하고 그렇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Ⅲ. 성령 충만의 증거는 핍박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인다고 위협해도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핍박이 무서워 적당히 타협하거나, 무서워 도망가는 게 아닙니다. 성령 충만 받기 전에는 무서워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 했으나, 이제는 핍박이 무섭지 않습니다. 왜요? 부활을 믿으니까요. 부활을 믿는 다는 거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보니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거칠 것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이래서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것입니다. 핍박이 무섭지 않고,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매를 맞고 욕을 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알았습니다. “기쁨으로 감옥을 나가니라” 아주 기가 막힌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이름으로 얼마만큼 핍박을 받아 보았습니까? 얼마나 손해를 당해 보았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하는 고난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쁨을 줍니다.
Ⅳ. 또한, 성령 충만의 증거는 말씀의 능력에 도취됩니다.
이 귀한 말씀을 전할 때 성령으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내가 뭔데? 별것도 아닌 사람이 한 마디 복음을 전했는데, 큰 역사가 나타나다니…. 베드로는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아 그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다 방언을 하고, 세례를 받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베드로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지난 주 오후 성령세례 특강 때,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고 안수를 했는데,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어떤 사람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서있지 못하고 주저앉으며, 방언을 말하고, 누르는 악한 영이 떠나고, 병이 낫고, 뜨거워지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전할 때,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와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그런 영광이 있습니다.
Ⅴ.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찬송가 66장 “다 감사드리세” 이 찬송가의 내력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작사가 M. Rinkart라고 하는 분은 독일의 목사입니다. 17세기에 독일과 유럽일대에 흑사병이 돌았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 목사님에게도 하루에 수십 명씩 죽어 나갔고, 날마다 오십 번씩의 장례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그 분의 아들도 흑사병으로 죽었습니다. 역사가의 기록을 보면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이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을 돕는다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돕는다고 하다가 다 전염되어가지고 죽어 수도원에 거미줄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흑사병에 마구 죽어 갈 때입니다. 자신의 아들도 죽어간 이런 때에 목사님은 “다 감사드리세”라고 하는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감사드리세….”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는 말합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간단하게 구별이 된다. 기독교인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원망, 불평하는 것은 세상 사람이요, 오로지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그도 그럴 것은 죽음을 넘어선 아름다운 세계를 전망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저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 부활, 머지않아 나 자신이 곧 부활하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들은 만족한 감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초월 했습니다. 그리고 충만합니다. 성령 충만한 체험, 여기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용기가 있고, 담력이 있습니다. 기탄없이 말 하더라 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대표적인 사람은 스데반을 생각합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충만하더라. 합니다.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습니다. 왜요? 하늘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 앞에 하늘이 열리고, 주님께서 서 계시고, 주님께서 환영을 하십니다. 그런고로 그의 앞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모델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그렇게 순교하게 됩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해서, 우리 다시 한 번 성령 충만하여 근심도 걱정도 사라지고, 오늘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감사와 찬양하는 그런 생활이 되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