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11ㅣ김남수 목사]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아주 빼어난 명작이 있는데 ‘스텐버그 십자가 ’라고 하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에 있었던 일이 일화로 전해지고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스텐버그’는 성 베드로 성당 ‘위고’신부의 요청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관한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그 성당의 부탁을 받고 얼마동안 그림을 그리다가 중단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 값이 너무 싸게 흥정되었다는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값을 다시 흥정할 생각으로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도 또 다름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페피타’라고 하는 집시소녀를 모델로 세속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다가 잠깐 쉴 때 모델 ‘페피타’가 초벌만 되어있는 완성하지 않은 한 그림을 보면서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그림이라고 그는 대답했고, 그 소녀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모습이군요.”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집시소녀의 질문입니다. 좀 귀찮지만 그는 설명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통상적인 성경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오셨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등 착한 일을 많이 하시다 이렇게 저렇게 되어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되었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페피타’는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냥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슬퍼합니다. 하도 슬퍼 하니까 ‘스텐버그’는 그 소녀를 위로할 마음으로 “울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 나셨으니 울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소녀는 눈을 번쩍 뜨면서 “진짜예요? 정말 부활하셨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 소녀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스텐버그’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만백성을 위해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셨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듣고 저 사람은 저렇게 밝은 생명력을 얻는구나! 그런데 나는 어떤가? 정작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는 것인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그는 여기서 마침내 부활신앙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래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림을 그리면서 돈 적게 준다고 다시 흥정을 하겠다고?” 그는 자신에게 “이 나쁜 놈아!” 하고 자기 마음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부활신앙을 회복해서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텐버그 십자가’는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영감을 주는 그림으로 기독교사(史)에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에 세 가지 실재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의 실재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 “우리가 그 증인이다” 즉 내가 보았다. 죽으시는 모습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만나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 한다”---따라서 핍박을 받든, 가난하든 부하든,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것이 초대교인들이 전한 단순한 증거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부활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단순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손을 만져보라.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는 자가 되라”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면 그 역사적인 사건을 의심하는 자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심하는 자가 많았다는 그 말씀이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을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으셨음을 저들이 다 아는데, 이처럼 이해 할 수 없는 주님의 신비한 부활사건을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이러한 사실들을 적나라하게 기록함으로써 오히려 분명하게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하자, 옆구리 창자국과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적인 개입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의 비판이나 인간들의 확신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요, 역사에서 일어난 실재적인 사건입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실재인 것입니다. 성경은 단지 사실만을 기록함으로써 믿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둘째는 우리 부활의 실재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므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귤나무를 보면 첫 열매가 먼저 익고, 그 다음에 불은 열매가 다 익듯이, 첫 열매로 예수님이 먼저 부활 하셨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지체가 되기 때문에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다 부활할 것입니다. 죽음이 명백하듯, 부활도 명백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된 몸의 형체를 입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처럼 변화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추한 모습, 약한 병들고 상한 마음과 정신으로 다시 산다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마는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처럼 강하고, 썩지 않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무덤을 앞두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죽음은 이미 과거지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롬6:11) 그렇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 안에서 벌써 함께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무덤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생이 인제 끝나도 이미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무덤을 뒤로 하고, 앞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리스도의 형체와 같이 변화되는 바로 그 순간 그 모습, 그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산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옛사람이 연합되어 죽었으니(롬6:6),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에 연합된 것입니다(롬6:5).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와 무슨 관계입니까? 그리스도는 우리들이 지은 낱낱의 죄들과, 부패한 본성,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옛사람과 연합되어 그 죄 값으로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 문제를 깨끗이 청산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기 때문에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으므로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으실 수 없는데 예수님은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 죄 값으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죄가 없는 의인이시오 우리의 죄 값이 완전히 청산되었음을 증명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자기 죄 값으로 죽으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나심이요, 그 분이 죄 없는 의인인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아나심은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되어 한 몸이기 때문에 우리의 살아남이요,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은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고,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예수님의 생명, 즉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생명, 영생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교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지극히 큰 그 능력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엡1:20- 2). 그리고 자신도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 권능에 참여하고자 힘썼습니다. 우리 예봄교회 교우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오늘,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 권능에 참여하여 체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는 부활의 능력이 실재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실재를 말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지금 하늘에 살아계신 보증으로 부활의 권능인 성령을 보내 주시고, 성령이 지금 우리 속에 와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우리는 오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거하셔서 나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사망의 종노릇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의 노예인 옛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사망과 죄의 노예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 합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에 가서야 영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현재 영생을 누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이것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부활의 능력의 실재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있기에 유무상통하고, 서로 사랑의 삶을 살며, 죄를 이기고 시험과 환난을 이기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되신 성령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부활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 부활의 능력의 실재를 믿읍시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부활신앙의 실재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과거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고 부활의 능력으로 충만했을 때,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순절 날 한 번 설교에 믿는 자가 남자만 3,000명이 되었고, 성전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키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베드로를 천사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우러러보고 있을 때에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일으키셨다고 예수님을 증거하자 믿는 자가 남자만 5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일로 유대의 공회에 잡혀가 심문을 받을 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매를 맞을 때에도 오히려 더욱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많은 핍박과 곤혹을 치를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고 합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베드로는 좀 우쭐대기 좋아하고, 칭찬받기 좋아하고, 앞서기 좋아하는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한 이후,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자기 명예, 자기교만이 싹 사라지고 예수님만을 높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권능,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참으로 겸손 할 수 있고, 참으로 진실 할 수 있고, 참으로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놓고 사는 사람처럼 담대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활의 능력,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병자들을 치료하고 기적을 행 할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요. 오늘 체험하는 것이요. 그 생명력에 의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부활신앙에 접할 때,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11절에 이렇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 지어다“ 자신을 대할 때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부활생명을 가진 자로 여겨야 합니다. 이웃을 대할 때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안목으로 보아야 합니다. “산 자로 여길 지어다” 이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을 살다가, 장차 부활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 부활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