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11ㅣ김남수 목사]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세례에 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에 세례를 베풀겠습니다. “세례를 베풀다”의 단어는 헬라어동사 baptizo인데 baptizo는 어근이 bapto입니다. bapto는 의미가 “무엇을 액체에 담갔다가 다시 꺼내는 행위”를 가리키는 사역동사입니다. 물세례의 의미는 세례 받는 사람의 전신과 인격전부가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시대 문헌을 보면 흐르는 물이 없을 때는 물을 뿌려 세례를 베풀라고 했습니다. 교회역사를 보면 세례의 양식은 세례와 침례가 같이 공존되어 왔으나, 장로교단은 물을 뿌려 세례를 베푸는 양식을 취했습니다.
Ⅰ. 그리스도인의 세례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가장 잘 소개하는 것은 예수님이 받은 세례입니다. 마3:13-15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많은 측면에서 우리의 본이 되듯이,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행위의 기준을 설정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예수님은 기독교 신자들이 그분의 자취를 따르도록 세례의 본을 설정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예수님은 기독교 신자들이 자기 자취를 따르도록 세례의 본을 설정한 것입니다.
마3:15절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은 이유와 그리스도인의 세례의 진정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15절에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러면 이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첫째, “이와 같이 하여”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본을 통하여 세례 받는 방식의 패턴을 세우셨습니다. 마3:16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물속으로 들어가셨다가 물 밖으로 나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합당하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임을 가리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중심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행위의 표현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다는 증거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거나 고백해야 할 어떤 죄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외적 행위로 그 내적 의로움을 이루신 것입니다.
세례 받는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그들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 죄인이기 때문에 세례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죄의 고백과 회개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은 의로워집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의를 그들에게 돌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세례 받는 이유입니다.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에 순종하는 외적행위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받아들인 내적 의를 완성한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 마음속에 이미 누리고 있는 내적 의를 이루는 순종의 외적행위인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인의 세례의 영적의의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세례의 영적의의를 자세하게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롬6:1-11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중요한 말씀이니 잘 들으십시오.
롬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이요”라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만일에 죄에 대하여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면서 동시에 죄에 대하여 사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이 두 가지는 절대로 함께 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롬6:2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이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중요하면서도 어려우니 예를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포악한 가장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폭력을 가하고 상스러운 말을 하고 술과 담배의 노예입니다. 이 사람이 탁자의 의자에 앉아 술을 먹으면서 담배를 피우다가 심장마비로 급사했습니다. 탁자에는 불이 붙어있는 담배, 위스키 잔이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담배도 위스키도 이 사람에게 어떤 반응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술에 대해서도 죽고, 담배에 대해서도 죽은 것입니다. 잠시 후 부인과 자녀들이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사람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화도 모욕하는 말도 퍼붓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화도 죽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도 죽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 사람은 죽었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죄는 더 이상 그 사람을 매혹하지 못합니다. 죄는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죄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에 관하여 그리는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죄는 더 이상 그 사람의 어떤 반응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가 죽을 때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 의에 대하여 살아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부활했습니다.
바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6:6-7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옛 사람의 타락하고 죄 많은 본성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죄의 몸은 죽었고, 죽음을 통하여 그 사람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가르침을 계속해서 다시 강조합니다. 롬6:11.12.14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에 있음이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간주해야 합니다. 왜?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가 계속해서 주장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를 지고 그 죗값으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 곧 우리의 옛사람 죄의 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용서 받은 다음,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죄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고, 죄는 더 이상 그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한 목적 속으로 들어가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롬6:6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과거에 역사 속에서 확실하게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가 죽을 때 함께 옛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롬6:11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바울은 “이와 같이”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경험과, 믿는 자의 경험사이의 일치를 가리킵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은 것처럼 너희도 죽은 것으로 간주하라”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함께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너희의 죽음이다” 그리스도 속죄의 핵심목적은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이 두 가지입니다. 신약 전체를 통하여 이보다 더 실질적으로 중요한 진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 진리에 대하여 무지하고, 무관심하고, 믿지 않는 진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했는데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이 진리를 알지 못하면 그것은 믿을 수 없고, 그것을 믿지 않으면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를 짓고 옛사람을 따라 정욕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진리를 오늘 아침에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후, 먼저 장사되고 그 다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중요한 진리와 그리스도인의 세례의식 사이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자연계에서 모든 사람이 죽음, 다음에는 매장이 따릅니다. 똑같은 진리가 영적인 세계에서도 적용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 속죄의 진리에 따르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 시체가 되었기 때문에 옛사람, 곧 죄의 몸을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다음 행위는 이 죄의 몸을 장사하는 것입니다. 이 장사를 지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세례의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세례는 두 가지 연속적인 단계가 있습니다. 장사, 다음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속죄를 받아들이는 믿는 자 안의 내적 두 단계와 부합됩니다. 1) 죄에 대한 죽음과 2) 의와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첫째, 무덤을 상징하는 물에 장사하는 것이고, 둘째,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무덤으로부터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 사는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장사는 죄에 대한 죽음과 옛사람의 죽음의 외적표현이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의와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삶의 부활의 외적표현입니다. 신약성경은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세례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롬6:3.4절에 “무릇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1) 세례(물에 잠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장사되었고, 2)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 안에 실제 살아계십니다.
세례의 효력은 세례 받는 사람의 개인적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효력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부활을 통해 하신 일에 대한 믿음으로 발생합니다. 믿음이 없이 단순한 세례의식 만으로는 아무런 효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또한 세례 받는 자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함은 자기의 능력으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으로 행합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 생명의 능력으로 행합니다. 하나님의 영만이 세례 받는 자에게 의로운 새 생명이 필요로 하는 능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다음 주 특강은 성령세례에 관하여 합니다. 사모하고 기도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신약성경의 패턴에 따르면, 새 신자들이 교회에 더해질 때마다 그들은 세례를 통하여 자기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함을 행동으로 취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죄에 대한 죽음과 장사됨에 둘째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에 대한 부활을 자기들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례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위대한 목적을 교회에서 계속 지켜나가도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