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5-10, 13-20, 27-32ㅣ김남수 목사]
미국 하버드 대학의 하비 콕스(Harvey Cox) 사회신학교수에 대하여 「USA Today」잡지는 다음과 같이 평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는 “사람들이 하버드 대학은 몰라도 하비 콕스는 알고 있다”고 격찬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하버드 대학이지만 하비 콕스는 더 유명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말로 들리지마는 그 만큼 하비 콕스가 오늘날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30년 전에 「세속도시」(The Secular City) 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이 나온 당시에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잘못된 신학이 있었습니다. 그 신학의 주제는 “신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죽었다하는 이야기 입니다. 이 과학세상, 날로 과학이 발달하니까 과학주의가 우상으로 올라서면서 일반적인 신의 죽음, 신을 의지하는 마음, 이런 것은 다 사라진다. 또 곧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들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심성은 이제 다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신의 죽음을 말하게 됩니다마는 이에 반대하여 하비 콕스는 말합니다. 세속 도시 속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 고 그는 갈파합니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농촌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도시는 마귀가 만들었다. 라는 말입니다. 갖가지 죄악이 여기(도시)에 다 있고, 여기서 움트고 여기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 속에는 하나님이 없고, 또 뿐만 아니라 점점 세계가 도시화하여가니까 하나님의 신비를 느낄만한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아니냐 이렇게들 말하는데, 하비 콕스는 생각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시 한가운데 그 세속도시 속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역사가 있다. 이렇게 역설해서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는데, 3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불길」(Fire from Heaven)이라고 하는 문제의 책을 씁니다. 오늘 21C를 향한 과학문명으로 인해서, 컴퓨터를 비롯한 인터넷, 전자공학, 이런 것이 발전함으로 많은 사람이 점점 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교회가 어려워집니다. 우리도 5일 근무제를 하는데 토요일까지 놀면서 또 교인들이 아예 금요일 날 저녁에 놀러갔다가 주일날 교회에 못나오는 일이 생긴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가다가보면 교회가 점점 침체 될 것이 아니냐. 교회의 종말이 온 것 같다--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하비 콕스는 말합니다. “애시 당초 교회는 성령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사회과학적이거나 정치학적이거나 무슨 세계변화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역설적으로 주장합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은혜, 이로 인해서 교회가 존재하고 또 교회는 부흥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성령 충만 이라는 것을 신학적인 차원에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는 성령 체험 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의지의 문제도 아니고 감정의 문제도 아니고, 과학의 문제도 물론 아니다. 이것은 성령 층만과 함께 오는 종말론적 의식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내 일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다. 이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고 나 자신에 대한 종말의식이 확실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원초적 성령 (Primer spirituality)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원초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 이 원초적 신앙을 두고 과학자들이 흔히 유치하게 생각하지만 당치 않습니다.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하는 단순한 믿음, 이것은 원초적 신앙이다. 기도하면 병이 낫고, 하나님의 뜻이면 병을 이길 수 있다 합니다. 또 이런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신앙,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절망이라고 하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초적 소망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성령 층만과 함께 해방의식을 가지게 된다 합니다. 그래서 율법이나, 혹은 자기 자신이나, 욕망이나, 두려움이나, 세상 복잡한 문제에 대한 그런 절망의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게 된다 합니다. 성령 받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영혼이 자유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합니다. 사실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그 영이 자유 하는 것이고, 그래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의 사람이 되고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이 원초적 영성이라는 것은 여전히 교회의 생명으로, 또 생명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교회는 영원하다, 라고 말합니다.
A. 한 사람이 변화 한다는 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1. 중생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중생해야 합니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율법 교사요, 지식이 높고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는 이를 이해할 수 없어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서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것이요, 오직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슥4:6절에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고 결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로 변화 된 사람, 다른 운명의 삶을 산 사람이 대표적으로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의 대학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에 핍박자인 그가 사도가 되고,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을 위해 한 평생을 살고, 복음을 위해 죽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예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원래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 입니다. 주께서 부르셔서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 동행하면서 그 많은 이적을 보고 귀한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배웁니다. 마16장에 보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 완벽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합니다. 그 많은 경험, 이적을 보면서 감격하고 놀랐던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고 도망가는 비참한 제자가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그를 버리지 않고 만나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생각은 못합니다. 그리고 물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가버립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번 이렇게 물으십니다(요21장)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다시 사랑을 다짐하게 하면서 결심도 없고 맹세도 없는 그를 향하여 “내 양을 먹이라”하십니다. 그는 드디어 재 소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때까지도 그는 다시 예수님의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생각 속에서 “예수님의 사람”됨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마음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있어요, 그러나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경험도 있고, 감격도 있었지만, 이 사건이 내안에서 생명력으로 작동하지를 못합니다.
2. 성령 세례(충만)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약속을 믿고 50일을 기다립니다.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게 될 때에 그는 성령 충만하게 되었고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용기가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고백하는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B. 성령 충만한 상태란?
“충만”이라고 하는 말은 성령이 그의 영과 마음을 붙잡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붙들리고 있는 동안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에 포로가 되는 순간입니다. 성령께서 그의 영혼을 사로잡으시고 그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상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말씀은 성령 충만한 제자의 속성(특징)을 아주 단적으로 확실하게 말해주는 그런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세례 즉 성령 충만 충만을 받고 변화되어 권능의 사람과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C. 성령 충만한 사람과 그의 증거와 고백
1.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에 유대의 정치, 종교를 총괄하는 곳으로 사람의 생사를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들이 빌라도의 손을 빌려서 사형집회를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벌벌 떨면서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지금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섰습니다. 오늘 그들의 특징은 담대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이들은 성령 충만 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의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사람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다는 존재의식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2.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항상 초점을 하늘에 두고 삽니다.
그런고로 지금 당하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이 자기의 부활신앙으로 승화합니다. 주후 150~215년, 알렉산드리아에 클레멘트라고 하는 유명한 교부가 있었습니다. 이 교부의 글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와 같은 시간에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아내를 보게 되었답니다. 아내와 같이 순교하게 되는 그때, 베드로는 자기 아내가 천국에 갈 것을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정말 기뻤어요. 자기가 순교하는 것은 물론, 아내까지 순교하는 것이 너무도 좋았던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는 아내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클레멘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보, 주님을 기억합시다. 나를 생각할 것도 아니고 자식을 생각할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 주님만을 생각 합시다.”
3. 또한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그대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제 영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의식했습니다. 그런고로 함께 계신 표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그 사람을 하루 이틀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따라 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딱 만나는 순간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감동해서 그 사람을 보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했더니 그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우러러 보며 추앙하고 있지만은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나와 함께 있다고 하는 증거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일 따름이다 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우러러 보느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이 자리에 나타나셨느니라. 이렇게 증거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함 입니다. 다 주님께서 친히 나를 통하여 역사하심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 역사하고 계시다 이것을 의식하고 이렇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4. 좀 더 나아가서, 이제 나를 지명하셨다는 데 대한 감격으로 삽니다.
하필이면 왜 나입니까? 많은 사람가운데서 어째서 나 같은 사람입니까? 어째서 나를 고용하시고, 나를 사용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까? 허물 많은 나 같은 사람, 나 같은 나약한 사람입니까? 사도 바울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핍박했고,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라 죄인의 괴수입니다. 그런데 그를 사로잡으시고 포로로 하시어 그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너무나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는데, 누구를 용서 못합니까? 그분이 나를 사랑하셨는데 누구를 미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5. 성령 충만한 사람은 좀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고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완전히 출애굽 나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용기가 대단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과거를 모두들 다 알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도망갔던 사람이 아닙니까? 3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다 아는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가 지금 담대하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어두운 과거를 다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 그의 불학무식한 것까지 알고 있고,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 잡았던 어부라는 것까지 다 알고 있는 그 사람들. 저거 형편없는 인간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자신의 모든 부끄러운 과거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무리 그의 발목을 잡아도 상관없습니다. 지난날의 내가 누구였는데도 상관없습니다. 깨끗이 지워버리고, 오직 주의 사람으로 주님께서 나를 쓰십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만 가지고 역사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얼마나 힘듭니까? 자기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 할 수 있다는 것,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더구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이것이 가능합니다.
결론: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께서 그의 마음과 영을 포로로 붙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담대히 주님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원수를 살랑하고 용서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며 축복합니다. 그는 어두운 과거로부터 완전히 나와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가 나타납니다. 아무리 큰 기적이 났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신 걸로 알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충만함입니다. 근심, 걱정, 모호함, 두려움, 다 사라집니다. 깨끗한 영혼, 밝은 미래, 오직 사랑, 그래서 여유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담력, 거룩한 권능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으로 인한 이 위대한 사랑과 용기, 담력과 권능이 오늘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