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6-10ㅣ김남수 목사]
은혜가 은혜 되려면, 은혜를 은혜로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이 큰 은혜에 사니 더 바랄 것이 없다. 내가 은혜를 받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바로 이러한 생이 그리스도인의 생이요, 행복한 生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도 깨닫지 못하고 비난하거나 원수로 갚는다면, 악마가 떠나지 않아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3중 장애자 헬렌켈러 여사는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할 수 없는 불행을 딛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훌륭하게 귀중한 일을 많이 하고, 저술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말년에 기자가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 육체적 고통과 함께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하나님을 원망해 본적이 없습니까?” 헬렌켈러 여사는 씽긋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없는데,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도 부족한데, 어찌 원망을 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남들은 그를 불행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떠날 때 그는 이렇게 유언을 했습니다. “나의 일생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이 어찌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게 주신 은혜를 앎으로”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바울이 깨달은 은혜를 같이 생각해 봄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방인 “디아스포라”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사실상 나그네 처지가 그리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이 처지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지 깨닫습니다. 사도바울은 히브리 사람으로 이방 헬라에 태어난 덕분에 헬라어와 히브리어 두 언어를 구사했습니다. 또한 헬라 문화와 히브리 종교, 두 문화를 통달했습니다. 그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는 몰랐다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내게 주신 은혜라고. 그래서 그는 이방인의 사도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이방인 사도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하심을 입은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라고 감격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직접적으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또 다른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래오래 참아주신 은혜였습니다. 잘못된 길로 갈 때,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할 때,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 잡으러 갈 때 …… 그가 계속 잘못된 길로 갈 때도, 오래오래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신데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의 진실을 알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핍박했어도 몰라서 한 일이요, 스테반을 해쳤어도 딴에는 율법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확실한 진실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충성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지만, 그가 진실되다는 것을 인정해 주심으로 오래 참아주신 하나님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특별히 그를 강권적으로 부르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강제로 그를 붙들어 포로로 하셨습니다. 강권적인 소명, 굉장히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소명이 불분명할 때, 힘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확신을 가지고 그의 뜻을 따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12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그분께서 바울을 붙잡으셨습니다. 포로로 하셨는데, 포로로 한 그것을 나의 목표로 삼고 쫓아 가노라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는 자기 약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교만 이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약할 때,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인간적으로 약할 때, 은혜로 강해집니다. 교만해 지지 않도록 약하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았고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도록 약하게 하려고, 겸손하게 하려고 병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세상적으로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의 세계에서 강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약할 때 강해지는 신비로운 은혜.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깨달은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자기를 겸손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겸손이 기독교의 모든 덕의 근본이요, 예수님의 성품은 한 마디로 겸손입니다.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습니다. 무슨 병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마는, 계속 그를 괴롭히는 병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간질병이라고 추측을 해 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설교하다 말고 쓰러진 일도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바울은 너무 괴로워서 이것이 떠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3번이나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상하게도 이 병은 고쳐주시지는 아니하고, 누가라는 의사를 동반하게 합니다.
세 번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교훈에 의하면, 자식이 아버지에게 무얼 요청할 때, 무슨 소원을 말할 때. 이어서 3번 거절 당했다면, 이젠 더 이상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는 이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하는 뜻입니다. 이 거절 속에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인 들의 신앙입니다. 무응답. 그것을 응답으로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장면을 비교해 봅시다. “하나님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똑같은 말씀으로 3번. 그러나 응답이 없습니다. 이제 무응답을 응답으로 받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실 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그러시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3번 구하셨는데 응답 받지 못하십니다. 못 받으신바 그래로를 응답으로 받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3가지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는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그래라”하고 응답하십니다.
둘째는, “기다려라, 아직 때가 안됐으니 좀 더 기다려야겠다” 기다리라 가 응답인 것입니다.
셋째로는 “생각을 바꾸라, 뜻을 바꾸라, 네 생각을 버려라”입니다.
세 번째 응답을 여러분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사도 바울은 이 때 주님의 은혜를 내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더 이상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맡은 바 은혜(=할일)를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맡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7.8절을 보십시오.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는 할례자를 맡기셨습니다. 유대 사람을 맡기셨습니다. 바울에게는 이방 사람을 맡기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는 이방인에게 복음전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나는 이것을 맡았다 하는 것입니다. 나의 할 일,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맡은 바 책임을 알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고린도서에 보면 더욱 더 자세하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었고, 어떤 사람은 물을 주고, 어떤 사람은 가꾸고, 어떤 사람은 거두고, …… 그는 자기 할 일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심었노라 누군가가 거두게 되겠지” 그런데 여러분 요새 사람들을 보면 너무들 조급합니다. 내가 심고 내가 거두려 합니다. 역사라는 것은 나는 심고, 저 사람은 가꾸고, 누군가가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역할 분담이 있습니다. 은사 분담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대에는 길을 내고, 기초 공사를 하고 끝낼 수도 있습니다. 다음 세대 사람이 거두게 되고 영광과 번영을 누리게 되겠지. 내가 할 일이 무어며, 우리가 할 일이 무어며, 이 시대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나는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람이다 합니다. 심는 것으로 족하다 합니다. 누군가 저 앞에서 거둘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같은 내게 주신 은혜를 앎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기둥 같은 분들과 교제의 악수를 했다 합니다. 당신이 맡은 것은 이것이요, 내가 맡은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에게도 은혜요, 나에게도 은혜요, 하고 은혜 속에서 서로 교제의 악수를 했다 합니다.(갈2:9) 악수란 동등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교제입니다.
전에 제가 강원도 황지에 있는 예수원에서 3개월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원 원장님이 “R.A. 토레이” 목사님의 손자이신 “아쳐 토레이”셨습니다. 그 분의 할아버지인 R.A. 토레이 목사님은 무디 선생과 같이 미국의 부흥운동을 일으킨 신학자요, 유명한 부흥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그의 부흥회에 참석한 어느 여자분이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예수 믿는지는 오래되었고, 목사님 부흥회도 여러 번 참석했는데, 아직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목사님께서 지혜롭게 대답하셨습니다.
“돌아가서 이제 다른 기도는 다 그만두고, 단 한가지 기도만 하십시오. 집중적으로 하나님! 나 자신을 알게 해 주세요. 내가 어떤 사람입니까? 나라는 사람을 보여 주세요” 여인이 이제 열심히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있는 자기 모습이 보이는데,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 만신창이였습니다. 그 추한 자기 모습을 보고 몸부림을 치고 울었습니다. 어느 날 여인이 목사님에게 다시 와서 말합니다. “제가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보여 주세요”라고 기도하십시오. 여인은 이제 “ 하나님 십자가를 보여 주세요.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해 주세요”하고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그 많은 죄 짐이 다 벗어지고, 깨끗한 흰 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 다음에 보니 자신이 엄청난 사랑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자신이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 참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때로는 성공도 주시고 잘될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도 주시고, 실패도 주시고, 고통도 주시고, 질병까지도 주십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이 모두가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직도 내가 생각하는 은혜에만 집착하고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은혜만이 은혜입니까? 내 소원, 여기에 꼭 매여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때로는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그의 은혜,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 은혜를 믿고, 수락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서 그의 은혜를 충만하게 알게 될 때, 바울처럼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그의 은혜 안에서 겸손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에게 있는 나의 은혜가 족하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주신 은혜가 바로 내 은혜입니다. 내가 만족스럽습니다. 내가 기쁩니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