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28-30ㅣ김남수 목사]
어떤 사람이 목사님께 상담을 하겠다고 찾아 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한참 들어보고 있자니 늘 근심 걱정에 싸여서 세상을 불만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목사님이 무슨 위로의 말을 해 주려고 해도 그럴 틈도 주지 않고 혼자서만 쉴 새 없이 이야기해 나갔습니다. 이야기는 전부가 근심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듣다 못해서 ‘그런 곳이 있지요.’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저 쪽 언덕 넘어 가면 그런 마을이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언덕 너머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소중한 초청의 말씀이자, 이 말씀에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보더라도 정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착취하고 박탈하므로 심히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근심 걱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타락하여 질서가 무너지고 생명력은 없는 교권과 형식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말씀 드림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다.’고 하신 말씀은 인간의 고통을 두 개념, 즉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 나누어서 총괄한 것입니다.
먼저, 수고한다는 것은 고생할 일이 아닌데, 만들어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생은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나친 욕심 때문에 스스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짐이 곧 수고하는 것입니다. 같은 노동이라도 보람 있고, 즐겁고, 기쁘고, 힘들지 않는 노동이 있습니다. 이 같은 노동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만족할 만한 대가를 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동은 우리에게 성취의욕을 북돋아 주고, 스트레스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일을 해도 만족이 없고, 피곤만 쌓이는 일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염려와 근심과 불안과 초고 스트레스만 쌓이고, 이와 같은 일은 그야말로 수고스럽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인생을 향하여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합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은총을 누리며 살도록 복된 상태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범함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지혜와 이상과 능력을 믿고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짐은 더 무거워졌습니다. 문명은 발전시켰으나 무거운 짐에 눌려 절망감으로 고통당하고 말았습니다.
본래 짐 없이 살도록 되어 있는 인간이 예비 된 은총의 세계를 벗어나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애쓰고 힘써 노력하라 몸부림치라고 하지 않고,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이 예수님께로 와야만 해결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속주가 되십니다. 아담이후 인간은 죄인이 되었으나,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악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깨끗이 사해 놓으시고, ‘내게로 와서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구속주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초청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전인구원의 원천이 되신 초청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인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죄인이라도 사랑하시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쉬게 해 주시겠다는 것은 인간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인간의 짐을 대신 책임져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쉼을 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인간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인생이 문명과 과학을 찾아간다고 해서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 지금까지 더 좋은 것을 찾아 헤매고 헤매었으나 쉼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옛날보다 더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인류는 역사 이래 인간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 받고 쉼을 얻으려면 ‘내게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초청에 응해야 합니다. 이 길밖에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게로 오라’ 하신 말씀은 인간이 처해 있는 처지로부터, 내 안일로부터, 그릇된 사상과 습관과 잘못된 행위로부터 떠나 예수님께로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나오는 행동으로 순종을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십니다.
‘멍에’라는 말은 마·소의 목에 걸쳐 얹어서 수레와 쟁기를 몰게 하는 가로나무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목수이셨으므로 멍에를 만들어 보셨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멍에가 어떤 것입니까?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고, 수욕당하시고, 비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지신 멍에입니다. 이 멍에를 함께 메라고 하시면서 ‘내 멍에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쉽다는 말은 몸에 ‘잘 맞는다.’는 뜻입니다. 마·소는 멍에가 제 몸에 잘 맞아야 무거운 것도 가벼운 듯이 잘 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멍에가 쉽다’는 것은 잘 맞는다, 무겁지 않다, 기쁘다는 뜻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쉼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멍에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멍에 밑으로 들어가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로 들어가기 위해서 나의 멍에를 메고 겸손하게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온유란 길들임을 잘 받아 순종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사나운 짐승은 온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길들임을 잘 받는 가축 유의 짐승을 보고 온유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온유한 짐승은 주인의 보살핌을 잘 받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중심으로 서서 살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온유하면, 그래서 순복하면 예수님의 멍에로 들어가 인생의 무거운 짐을 덜고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겸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은 교만과 반대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중심으로 자기를 섬기고, 자기를 과대평가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지고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들어가 쉼을 얻으려면 겸손하게 낮아져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순복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책임져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길들임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고 짐을 맡아 주십니다. 그러나 오만한 사람에게는 억압과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을 가벼움이라’고 하신 말씀이 뜻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왜 멍에가 쉽고 가볍다고 하셨을까요?
첫째, 하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가던 때에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던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기 조차 힘든 박해와 고문을 당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협박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썰물 때에 바닷가에 십자가를 죽 세워놓고, 거기에 사람을 매달아 놓습니다.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 잠겨서 죽게 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 수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순교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던 포루투칼 선교사는 너무나 답답해서 하나님께 ‘능력을 나타내 주옵소서.’, ‘저들을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능력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 선교사는 피땀과 눈물을 흘리며 더 안타깝게 ‘하나님,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귀에 또렷하게 들여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을 뿐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당한 고난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나아갈 때 그 멍에는 어떤 고난이라도 쉽고 가볍고 기쁜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으로 메는 짐이기에 가벼운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고통은 심리학자들의 분석한 것을 보면, 큰 원인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욕심이요, 하나는 증오라고 합니다. 이 증오는 위장병, 두통, 관절염, 심지어 암 병이 될 수 있으나, 증오가 사랑으로 바꿔지면 가벼워집니다. 증오하고 교만하면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는 일은 힘이 들지 않습니다. 내 짐이 가볍고 무거운 것은 나의 사랑을 점검해서 가늠해야 할 일이지 저울로 달아 가늠할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사랑이 식었느냐 뜨거웠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느끼며 하는 일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그 사랑에 감격해서 살아가는 삶은 결코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짐이 무겁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 짐은 그 성격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요,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바꿀 때 가벼운 것입니다.
셋째, 내 멍에를 벗어버리고 나서 메는 멍에, 곧 죄 짐을 벋고 그리고 메는 멍에이기 때문에 가벼운 것입니다.
죄에 짓눌려 있으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 받는 확신 가운데 지는 십자가 고통이라는 것은 오히려 가벼운 것입니다. 죄의식으로 인한 형벌의식 때문에 짐이 무겁고 피곤한 것입니다.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함 받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고난이라면 이 짐은 시련이요, 영광이요, 기쁨이요, 나를 연단시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요, 선교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무겁게 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쓰러지고 쓰러지시는데 옆에서 따라가다 로마 병정에 의해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십자가의 뜻도 모르고, 무거운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십자가를 메었던 어깨를 만지며 평생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다니! 이러한 일이 나 같은 사람에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순교할 때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겠다고 하니, 예수님처럼 바로 서서 십자가에 달린 것은 무엄한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거꾸로 메달아 달라고 했답니다. 그 옛날 예수님을 몰랐을 때 골고다로 메고 가던 십자가가 그토록 무거웠는데, 지금은 손과 발에 못 박아 거꾸로 세워 놓는데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그저 가볍고 기쁘기만 했습니다. 죄를 벗고 지는 짐이요,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지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지는 짐이 무겁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약속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결코 무겁지 않습니다. 죄책에서 벗어나 죄의식에서 자유하고, 허무와 목적 없는 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목적을 찾고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살 때에 삶의 짐은 가볍습니다. 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멜 때에는 짐은 영광스러우며, 나에게 보람을 안겨줍니다. 내 생의 의미가 멍에에 있는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 내 멍에를 메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쉼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