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1-11ㅣ김남수 목사]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성프란시스코의 사랑하는 제자 한 사람이 깊이 기도하며 명상 중에 있었습니다. 그는 환상 중에 천국에 이끌리어 올라가게 되어 천국의 화려한 광경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이곳 저곳을 살펴보는 중에 아주 가장 높고 영광스럽게 장식한 보좌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좌에 앉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상해서 빈 보좌를 보고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이 보좌는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까?” 그때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겸손한 성프란시스코를 위해서 마련한 것이오”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무리 스승이지마는 너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해서 시기심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스승이 그런 대접을 받을 만큼 위대한 스승은 아닌데 싶었지마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환상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선생님을 따라 다니면서 계속 지켜보았습니다. 아! 그분이 그렇게 위대한 분인가? 하늘에서 그렇듯 높이는 분인가? 하고 그는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스승과 단 둘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프란시스코는 서슴지 않고, “물론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자는 반박을 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세상엔 살인강도도 많고, 도둑놈도 많고, 갖가지 죄인들이 많은데, 아~! 당신께서는 성인으로 추앙 받는 터에 이렇게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이거야말로 위선이며 거짓말이 아닙니까?”
프란시스코는 빙그레 웃으면서 아주 평화로운 가운데 진실을 말합니다.
“그건 자네가 몰라서 그래. 나는 원래 악한 사람이었어. 지금도 악한 사람이야. 그리고 오늘 내가 이만큼이라도 되어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세. 만약 내가 받은 이 많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푸셨다면,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선한 사람이 되었을 거야”
여러분! 참 겸손이란 것이 어떤 것입니까? 참 진실이란 것이 어떤 것입니까?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할 것입니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보다 훌륭하다. 나는 더러운 것이 가득한 사람이다. 자기의 본래 죄인인 것. 그 진짜 자기 존재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런고로 아무것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악한 사람이니까요.
이런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빛의 사자로 둔갑한 사탄이 사막에서 기도하고 있는 교부에게 다가가서 그를 시험합니다. 사탄은 빛나는 천사의 모습을 하고 다가가서 그를 유혹합니다. “나는 가브리엘 천사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귀중한 메시지를 가지고 네게 왔노라” 고 말합니다. 그때 교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보냄을 받았겠지요. 저는 천사의 방문을 받을 만한 사람도 못되고, 아무런 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탄의 방문을 물리쳤습니다. 사탄은 실패하고 그 자리를 떠나면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겸손한 자는 사탄인 나도 유혹할 수 없다” 여러분! 겸손한 자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반대로 교만하면 사탄의 시험에 그대로 빠져듭니다.
성도 여러분! 고민이 있습니까? 때로는 좌절합니까? 실망합니까? 낙담하십니까? 이 모든 것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만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의 해결의 마스터 키는 무엇입니까? 교만과 근심. 좌절과 실망. 낙담을 극복할 수 있는 마스터키는 딱 하나 겸손입니다. 겸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겸손한 만큼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자기를 낮추는 순간, 모든 것이 감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결론을 내립니다. 겸손은 복입니다. 내 스스로 겸손할 수 있다면. 그건 큰 축복이고, 내가 겸손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비상조치를 취해 겸손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더라도 겸손만 바로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복을 얻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를 낮추시고 낮추시기 위한 비상조치였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가 한 평생 있었습니다. 그래서 낮추고 낮추어서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은혜가 은혜 되어 그 은혜가 능력이 되고 사명이 되어서, 자신에게 영광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만일 가시가 있다면은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취하신 비상조치라 여기고 겸손히 받아들이고, 감사하십시오. 사람 만들려고 비상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이 주는 시험에 넘어가 교만하고 공동체보다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면 우쭐대게 되는데, 그러면 자신도 괴롭고 남도 괴롭고 … 내가 이쯤 되니 쫌 알아달라고, 마음속에서는 부글부글 외쳐댑니다. 본래는 지혜도 능력도 자식도 내놓을 것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는데, 뭐가 된 것처럼 교만을 떨면, 교회와 지체들을 세우고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와 지체들을 허물어 뜰이고, 요란스러워지며, 성장을 막고,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그 공동체를 사랑하여 하나되게 하고, 성장시키며, 교만한 자는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비상조치를 쓰십니다. 그대로 방치하게 두면, 교만이 염병처럼 번져나가 모두 망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음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자신에게 겸손하고, 그리고 이웃에 대하여 진실로 겸손한 마음을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문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만하다. 나는 교만하기 쉬운 사람이다. 그저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또 고개를 쳐드는 사람이다” 나는 교만하다” --- 그것이 겸손입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벌써 그는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암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아주 작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사랑을 받은 교회요. 당대의 가장 높은 칭찬을 받은 교회지만, 그래도 그 교회 안에는 하나가 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염려하면서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2-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3중의 권면에 순종하여 겸손 하라고 합니다.
3중 권면은 ①하나가 되어(2절) ②자기가 낮아지며(3절) ③서로 돌아보는(4절) 생활을 하도록 권면하고, 그 방법으로 겸손을 강조하면서, 겸손의 모범으로 5절의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니” 품어야 할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인데 한 마디로 말하면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반대되는 것은 사탄의 마음인데, 하나님같이 높아지려 하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행동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어떻게요? 이것이 바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신 말씀. 예수님의 성 육신 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성 육신의 겸손을 4가지로 설명합니다.예수님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동등 된 영광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본래 신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이 되신 4단계를 바울은 본문에서 설명합니다. 성 육신은 실제이면서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가 잇습니다. 특강 때 말씀 드렸습니다. 성 육신의 진리를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 그대로 받아들여 믿으면, 신앙에 큰 축복이 됩니다.
성 육신이 되신 겸손의 4단계는 첫째 “비워”, 둘째 “되셨고”, 셋째 “복종하심으로”, 넷째 “높이셨다”입니다.
첫째 7절에 “비워” 비운다. 비워버린다. 자기자신을 비워버렸다 비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겸손히 비워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겸손해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겸손은 사랑인데, 비우고 주는 것입니.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셔서 스스로 비우는 것이었습니다. 겸손은 사랑인데, 비우고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0:18에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버리노라, 이것이 겸손입니다. 아주 비워버립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나는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있으나 없는 것처럼,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몰라지고 맙니다. 유능하지만 무능해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바보가 되신 것입니다. 그 능력이 많으신 분께서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둘째는 7절에 사람과 같이 “되셨고”되었다. 되어버렸다. 사람과 같이 되었다. 종이 되었다 입니다.
비워서 또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겸손은 낮아져서 같은 동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병자가 되셔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놓으시고 병을 치유해 놓으셨습니다. 되는 것, 이것이 사랑이며 손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치료 자로 영접하여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치유 받고 자유케 됩니다.
셋째는 복종하셨다 8절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여기 복종은 원문에 노예가 하는 복종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노예가 되셨습니다. 스스로 종으로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사람의 종이 되셨으나, 내용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예수님은 벌레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로마 병정들에게 끌려가 매맞고 죽으신 것 같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예수님께 복종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는 순간 온전하게 복종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시는 순간 온전하게 복종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그대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요한복음18:11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조용하게 겸손히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겸손입니다.
넷째 9절에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겸손하게 되면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기도의 응답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그냥 들어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게 만들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교과 과정입니다. 달란다고 그냥 다 내어주지 않습니다. 겸손을 갖춘 다음에 내어 주십니다. 겸손한 마음에, 겸손한 그릇에, 하나님께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제야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셔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지극히 높여 만 왕의 왕이 되게 하시고, 만 주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자기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처럼 맹랑한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나는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서는 높이시는 바로 여기에 축복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모든 문제의 깊은 원인이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을 품으라! 그 그리스도의 겸손. 그 마음을 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