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5 ㅣ 김남수 목사]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사랑의 필요를 느껴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본절에서 성령님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붓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부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인간의 어떤 사랑보다 숭고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노정에서 여러가지 다른 형태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예를 들면, 가족간에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 남편과 아내의 부부간의 사랑,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과 같은 친구간의 사랑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인간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I.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
이와 같은 모든 형태의 사랑은 인류의 모든 사회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특별한 사랑이 하나님의 가족을 다스리는 새 법으로 요한복음 13:34~35절에 나타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말을 만드신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랑이란 단어의 동사형 “아가파오(agapao)”는 사용된 적이 있지만 “아가파”(agapa) 명사형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아가페(agape)는 헬라어 아가파(agapa)의 영어식 표현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사랑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너희를 향해 아가파를 가진 것처럼, 너희도 서로에 대해 아가파를 가지라”입니다. “아가파”는 3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과 성령님 사이의 완벽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아들을 내어 주시고,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인간의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속량해주신 사랑을 뜻합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이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심령에 성령을 통하여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사도요한은 요일 4:7~8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어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도요한이 사용하는 헬라어는 “아가파”와 “아가파오”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는 사람은 경험할 수 없는 아가파 사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아가파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사랑을 어느 분량만큼 나타내는 사람은 새로운 탄생을 통하여 그 분량만큼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누군가 위로부터 거듭나면 아버지의 본성이 그 영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듭나기 이전, 우리의 인간적인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아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감히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교회가 오순절날 처음으로 탄생했을 때,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내어 놓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는 현상은 이 땅에 임한 새로운 종류의 사랑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령에 의해 신자의 마음에 부어진 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정의합니다.
로마서 5:6~8절에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정결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은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이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바울은 어떤 사람이 자연적인 사랑으로 자기 친구를 위하여, 만약 그 친구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면 죽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연적인 사랑으로 자식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주는 것처럼. 그 다음에 바울은 자연적인 사람을 요구할 수 없는 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초자연적인 사랑이 확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쳐 죽은 사람들을 묘사하시기를 “연약하고…경건치 않는…죄인들”이라는 세 가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 아가파를 온전히 충만하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와 비슷하게 정의합니다.
요한일서4:9절에 “ 하나님의 사랑 아가파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이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 주어진 것도 아니고, 사랑을 주기 전에 보답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사랑스럽지 않고, 사랑을 받을 가치도 없고, 심지어 공공연하게 하나님에게 반역한 사람에게 먼저 값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사람을 위해 하는 기도에서 이 아가파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와 똑같은 사랑은 순교자 스데반이 죽기 전에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Ⅱ. 사랑은 가장 위대한 것
바울은 아가파 사랑의 독특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전 13장에서 사랑의 우월성과 특성을 말했습니다.
모든 은사들을 능가하는 사랑의 우월성 : 고전 13:1-13
바울은 고전 13:1-3절에서 다른 모든 은사들을 능가하는 사랑의 우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라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바울은 위대한 학자였고, 언어적인 재능이 가장 높이 평가 받는 것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이 땅의 모든 언어를 이해하고, 천사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어도 아가파가 없으면 나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가한 것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굶주린 심령이 사랑을 달라고 얼마나 부르짖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가파 사랑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간의 굶주린 심령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아가페가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바울은 예언의 은사에 대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미래를 읽을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또 국가의 분열이나 사회문제와 세계문제의 해결을 알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그가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을 수용할 건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에게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를 둘러싼 신비의 계시를 알고, 아무 저항이 없는 전기를 얻는 방법을 알고, 핵의 능력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는 방법을 안다할지라도, 사랑 아가파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아가파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산을 옮기는 이 믿음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 해 왔는지요! 언어, 지식, 지혜, 믿음 이 모든 것은 오늘날 학문 세계가 추구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가지므로 세상의 대학들이 일어나서 학문세계의 왕관 없는 왕으로 우리를 칭찬해 준다 할지라도 “아가파 사랑이 너희 삶에 없다면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야!”하고 바울은 우리 귀에 속삭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아가파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누군가 이 세대의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또 도시와 마을에 도서관 병원을 지어주고, 인류애로 가난한 사람에게 옷을 입혔어도, “아가파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어떤 유익도 되지 않습니다.” 그는 인생을 낭비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모래더미에 물을 쏟아버린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학습이나 성취도 사랑이 없으면 실패입니다. 아가파 사랑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져오신 새로운 사랑으로 우리 심령에 부어진 하나님의 생명인데,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 아가파 사랑은 인간의 절망적인 울부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아가파 사랑의 특성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사랑이란 단어는 필레오였습니다. 필레오는 인간의 사랑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 남편과 아내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필레오와는 다른 아가파 사랑의 특성을 고전 13:1-7절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파와 인간의 사랑인 필레오를 간단히 대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가페에 자기 이름을 넣으면 이상해 보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넣으면 완전히 조화를 이룹니다.
“아가페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필레오 사랑은 고통을 당할 수도 있으나, 짐을 짐으로 인해 더욱 견디기 힘들어하며, 필레오 사랑은 시기와 질투를 드러냅니다.
“아가페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필레오 사랑은 항상 자랑합니다. 이기심이 필레오의 힘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필레오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게 갑자기 질투하며 저속하고 시끄럽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필레오 사랑은 시작부터 끝까지 고군분투하는데, 그것은 자기의 유익을 얻고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필레오 사랑은 예민하며 다루기 힘듭니다.
“아가페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필레오 사랑은 항상 세상의 추물을 주절대며 웃고 떠들어 댑니다.
“아가페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필레오 사랑은 자기와 대적하는 자가 넘어지면 기뻐합니다.
“아가페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필레오 사랑은 젊은 시절 방탕한 삶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성인이 되기 전에 실패의 바위에 내팽개쳐질 위험이 있습니다.
Ⅲ. 사랑의 열매 맺기
사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군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면 아버지의 본성이 그의 영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거듭나면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거듭나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오늘날 그 누구도 아가파 사랑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 세례를 받을 때, 그분의 사랑이 심령에 풍성히 부어집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롬 5:5) “부은바 됨이니”의 동사 시제는 완료형입니다. 완료형은 완결과 완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사랑의 모든 충만함을 남김없이 받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쓰는 양보다 무한하게 더 많이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생수의 강(성령 충만)을 갖고 있어 넘치도록 흘러 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7:37,38) 사랑이 충만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부어졌지만, 나의 영에서 자라나고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본성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성 사랑이 영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이 사랑이 흘러 넘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히 부어져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권능이 임하며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사모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성령세례를 구함으로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포도나무의 가지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는 사랑의 포도나무이며, 가지인 너희를 통해 열매를 맺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며, 열매는 포도나무의 가지가 맺습니다.
재창조된 인간의 영은 가지입니다. “오직 영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간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
사랑이 인간의 마음의 열매가 아닌 영의 열매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즉 심령에 부은바 됨이니”- 성령이 우리 영에 믿음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영을 좇아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의 열매,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으로 깨끗케 해야 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나느냐고 합니까? 말씀을 묵상함으로, 말씀을 실천함으로, 성령님께 자신을 드려 순종할 때, 사랑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게 된다고 합니다.
말씀과 함께 하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행할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인 육신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지 않습니다. 성령과 말씀은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본성을 닮은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십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닮도록 사랑을 부으셔서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성령께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예봄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