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6-21ㅣ 김남수 목사]
요한복음 3:16절 말씀은 세계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으로 성경 전체의 요절이 되는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본문을 복음중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네 가지 개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고, 셋째로, “아들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고, 넷째는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가 복음중의 복음이요 사랑의 원리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사랑하셨다”입니다.
여기에 깊이 착안해야 합니다. 세상에 이런 저런 문제가 많지만, 그러한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은 사랑입니다. 사람이 악해지는 것도 사랑에 그 원인이 있고, 사람이 병들어 죽는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사랑을 의심하게 되면 당장 감기에 걸립니다. 어린이의 세계일수록 더욱 민감하여, 비록 말을 못할지라도 사랑의 언어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도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만이 문제의 마스터 키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일본에 유명한 신앙인이 있는데 「카가와 토요히코」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느 시장의 소실 태생입니다. 서자인데 그 형제들이 하나 같이 서자라고 무시하고 학대합니다. 어느 날 시무룩해 있는데 구세군이 나팔을 불면서 노방 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으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하고 소리치며 지나갑니다. 어린 카가와 토요히코는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서자도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저 감옥에 있는 죄수도 사랑하십니다.” 토요히코는 당장에 그 대열을 따라 나섰습니다. 전도 대원이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쓴 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개의 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어느 누구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 이 같은 깨달음에서 새로운 출발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나 모르거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산다”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둘째,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것도 주고, 저것도 주고, 다 주십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고, 죄인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 주어도 자존심만은 안 주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인격도 주고, 명예도 주고, 의를 주고, 자기 자신마저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가 나와 같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뜻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바로 “의”입니다. 그가 죄인이 되심으로 우리가 의인이 되고,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잘 살고 못 살고, 오래 살고 일찍 죽고,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너를 의롭게 하노라”,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하노라” 하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극치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셋째, “아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야 말로 꼭 믿어야 알게 됩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믿어야 알게 됩니다. 그런고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사랑을 알 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6:69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신인 줄 믿고 알았습니다.” “주가 그리스도이심을 내가 믿고 알았습니다.”고 합니다. 믿음이 전제입니다. 믿고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알려고만 애쓰지 말고 그냥 믿으십시오.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 싸웠습니다. 알지 못하고 어떻게 믿느냐고 서방교회는 주장하고, 동방교회는 믿습니다 하면 됐지, 뭘 따지느냐고 서로 주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어거스틴이 나와서 ‘알려고 하지만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믿으니까 이해가 되고 알게 되고, 이해가 되고 알게 되니 믿음이 깊어졌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후 싸움이 끝나고 이 말씀대로, 믿음이 전제되고, 그 후 이해하게 되고 믿게 된다고, 정리되었습니다. 그런고로 가장 큰 축복은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랑을 체험하면, 하나님을 더욱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사랑이 없습니다. 왜요? 믿음이 없으니까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을 받는 자는 주는 자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려고 하셨습니까?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이 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믿게 되면 그 속에서 내가 다시 태어나,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독생자를 주기까지 사랑한다” ? 내가 너희를 “이처럼 사랑한다” 종탑에 있는 십자가를 쳐다 보면서 사랑의 의미,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내가 믿어야 합니다. 믿어서 깨닫게 될 때에 엄청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나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실 만큼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자각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넷째,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을 믿으면 영생하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순간 나는 소중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기 존재가 살아납니다. 여기에 영광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행복합니다.
O. 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 보면 가난하지만 서로 너무도 사랑하는 부부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합니다. 남편은 아름다운 아내를 사랑해서, 예쁜 머리핀을 하나 사주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회중시계를 팔아서 아내의 머리핀을 샀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회중시계에 줄이 없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시계줄을 사주려고 그 아까운 머리채를 잘라 팔았습니다. 드디어 이 사랑스런 부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둘 다 필요 없는 선물이 되었습니다. 머리채를 잘랐으니 머리핀이 필요 없고, 시계를 팔아 버렸으니 시계줄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고 귀한 선물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 귀한 선물은 사랑이었습니다. 아름답고 진실한 사랑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날로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부하면 이상하게도 사랑의 질이 떨어집니다. 또 가난한 사람은 유복한 사람에 대한 시기로 인해 속에 갈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뜻이 퇴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현대인의 인간성이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참 사랑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시는 말씀을 바로 들을 때, 바로 믿게 될 때, 사랑의 사람으로 다시 창조될 것입니다.
사랑 받는 나의 존재를 알고, 사랑 받는 이웃을 바라볼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에 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영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