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46-47 ㅣ 김남수 목사]
하나님께서는 대그룹과 소그룹이라는 ‘두 날개 가진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대그룹은 축제로서의 주일 모임을 의미하며 소그룹은 몇 가정이 가정에 모이는 소그룹을 의미합니다. 교회역사상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고 생동감이 넘치는 교회는 초대교회인데, 이 교회는 대그룹과 소그룹이라는 두 날개를 사용했습니다. 행2장 27절을 보면 초대교회는 “성전”과 “집”에서 모임을 가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모임은 대그룹 모임이었고 가정모임은 소그룹 모임으로 초대교회는 두 날개 가진 교회였습니다.
오늘은 먼저 두 날개, 즉 소그룹과 대그룹에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내재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 우리가 초월적인 하나님을 어떻게 체험하고 승리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Ⅰ. 두 날개인 대그룹과 소그룹은 하나님의 초월하심과 내재하신 성품을 반영했습니다.
1. 하나님의 초월하심과 내재하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이란 위대하시고 높이계신 하나님, 멀리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초자연적인 능력의 하나님, 가까이 가기 힘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인간의 기적을 뛰어넘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할 때, 우리는 군중의 배고픔에도 관심을 가지신 친밀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초월하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우리는 친밀한 내재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초월하신 하나님을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능력, 특징을 내재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의 내재성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친밀하신 하나님,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 스스로 낮아지시고 겸손하여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친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 위로받고 격려를 받으며 힘을 얻고 소생함을 얻습니다. 성경에 보면 간음한 여인은 주님의 관용과 용서를 받고 변화되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초월성은 인간의 범주를 넘은 높으신 자연을 초월한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고, 내재하는 하나님은 우리가운데 친밀하게 계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빌 백햄 박사는 ‘대그룹 모임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경험하는 것이며 소그룹 모임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초월하신, 높으신 하나님과 동시에 내재하신, 친밀한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경험하면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인간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 아담과 하와는 초월하시고 내재하신 하나님과 에덴동산에서 같이 대화하고 거닐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이 들어가 미혹함으로 인간이 범죄하여 초월하시고 내재하신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단절되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여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자신의 계시하심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초월성을 계시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시내 산에서 연기, 천둥, 번개와 함께 가까이 갈 수 없는 경이로운 모습을 나타내십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의 경계선 안으로 못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죽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비가 오게 한 기적은 인간의 한계를 넘은 초월적인 사건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내재성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찾아오셔서 친밀히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자녀, 이삭을 주셨습니다. 다윗도 초월하신 하나님을 삶의 모든 곳에서 함께하신 목자로서의 하나님의 내재성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족장들이나 특별히 선택한 선지자들에게만 초월성과 내재성을 나타내셨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초월적인 멀리계신 하나님이셨고 특별히 선택된 자들에게만 초월적인 하나님이 내재하신 방법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 주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지성소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지성소의 휘장이 초자연적으로 위로부터 아래로 두 쪽으로 찢어졌습니다. 이 초자연적인 사건이 이제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연합되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구약시대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선택한 족장들이나 선지자들만이 초월적인 하나님을 내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는 초월하신 하나님이 친밀한 인간으로 낮아지셔서 오셨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연합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는 초월적이고 동시에 내재적인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을 그의 몸인 교회안에 거하시고 함께하시며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주님은 그의 교회가 이렇게 초월적이고 내재적인 하나님의 본성을 경험하며 살아가도록 교회를 고안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신 이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초월하신 하나님으로 앉아계시며 또한 승천과 재림 사이에 보혜사 성령을 대리자로 보내셔서 그의 교회와 함께하시고 그 안에 내재적으로 임재하고 계신 것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개인과 소그룹과 대그룹에 함께하시고 그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주님은 함께하시고 속에 계시기 위해 즉 내재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방법으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인과 함께 하는 법을 준비하셨습니다.
첫째로 개인적으로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십니다. 둘째로 소그룹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십니다. 셋째로 대그룹 안에서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대그룹 환경은 하늘에 계신 초월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그룹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머무시며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성삼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초월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은 내면으로 들어와 내재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고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또한 소그룹 환경은 우리 가운데 거하신 ‘가장 가까우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친밀한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그룹 안에 함께하신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기쁨과 감사를 주시며 친밀함을 경험하게 하시므로 우리는 치료받고 변화됩니다.
마 18장 20절은 우리가 소그룹으로 두세 사람이 모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떻게 관계하시는가를 계시해 줍니다. 이 말씀은 두세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때 그리스도와 나와 단체적인 관계를 설명해 줍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일 때 나도 그들 가운데 있겠다.’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일 때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위대하시고 충만하신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심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12명이 넘으면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12명의 소그룹을 만드셨습니다.
성경은 ‘혼자 쫓으면 천을 쫓지만 둘이 쫓으면 만을 쫓는다고 했습니다.’ 마18:19절에 ‘그러므로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작은 가정교회, 소그룹, 셀은 1세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가정에서 모인 소그룹에 내재하신 그리스도께서 온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로 내재하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 때 초대교회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Ⅱ. 대그룹과 소그룹이라는 두 날개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경험하는 방법
사단은 아담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남으로 동시에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잃어버리게 했지만, 주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성전에 모인 대그룹과 각 가정에 모인 소그룹, 두 날개 가진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두 날개 교회는 초월하신 하나님과 내재하신 하나님의 본성을 반영하도록 하신 유일한 장소인 것입니다.대그룹과 소그룹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본성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대그룹의 초점은 모일 때 대부분 하나님의 초월성에서 시작됩니다.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축제의 예배를 드릴 때, 때로는 감동하며 감사하며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병이 치료되며 귀신이 떠나가고 성령의 권능이 임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는 내재적인 역사로 옮겨가며 우리는 변화됩니다. 반면 소그룹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초점은 대부분 안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을 느끼고 격려와 위로하심을 느끼며 그 가운데 거하신 내재성으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초월성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의 소그룹과 대그룹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환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소그룹과 대그룹으로 두 날개 가진 교회로 고안하신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목적은 하나님의 충만하신 초월성과 내재성을 체험하게 하신 것이고 둘째목적은 교회를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세상에 계시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대그룹으로 모여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합심해서 뜨겁게 기도하며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의 권능을 받고 병자가 고침 받으며 하나님의 초월성, 즉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의 권능과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열심히 모여 뜨겁게 찬양하고 열심히 기도합시다. 또한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모여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 내재하신 다정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며 위로와 격려와 소생함을 얻고 치료받으며 그리스도를 전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모여 진솔하게 나누고 서로 격려하고 기도가고 서로를 세웁시다.
Ⅲ. 그러면 기존의 구역예배와 셀 모임(소그룹)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구역예배를 통해 소그룹의 기능을 강조해오지 않았습니까?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그 기능을 감당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면에서 구역예배는 소그룹 날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소그룹모임은 대그룹모임과 성격이 다를 때만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데 대부분 한국교회에서 행해지는 구역예배는 주일 대예배의 축소판이라 대예배의 보완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내재성을 경험하는 법을 잊어 버렸습니다.
둘째 구역모임이 한 번 더 모이는 모임으로만 존재할 뿐 작은 교회화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셀 교회의 회복, 작은 교회의 회복이 요청되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개척교회도 교회인 것처럼 셀 교회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셀 교회에는 목사도 없지 않느냐고 질문하시겠지요. 그 대답은 셀 리더가 바로 목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셀 교회에서는 셀 그룹을 목장교회, 셀 리더를 보통 목자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셀 교회 전문가들과 신학자들을 평신도가 목자라고 불리 우지 못할 어떤 신학적인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만인 제사장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평신도가 집에서나 성전에서 말씀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 예로 빌립집사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장로님이나 권사님 집사님이 새벽기도회, 삼일 기도회, 금요 철야 기도회를 인도합니다.
Ⅳ. 두 날개가 약속한 것
만일 우리 모두가 두 날개를 통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체험하면서 두 날개의 지체가 되어 날기 시작한다면 세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초대교회처럼 첫째 우리가 있는 곳이 사역의 장이 될 것입니다. 전도하고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간증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일만이 아닌 모든 날, 매일 매일이 사역의 날이 될 것입니다. 소위 신학교를 나온 목회자만이 아닌 모든 평신도들이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셀 교회 운동은 단순이 소그룹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사역에 대한 지금까지 기존의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함을 의미합니다. 셀 운동가들을 한결 같이 모두 말하기를 ‘첫 종교개혁이 사제의 손에만 있던 성경을 평신도의 손에 돌려준 사건이라면, 제2의 종교개혁은 목회자의 손에만 있던 사역을 평신도의 손에 다시 되돌려 주는 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평신도 사역자란 말이 결코 목회자 무용론을 뜻할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는 여전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도자로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무엇일까요? 엡 4:11~12절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볼 때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하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역할이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는 모든 성도들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련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을 훈련하고 가르치는 일에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일에 힘쓰다보니 우리 교회의 일에 온 힘을 쏟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남은 생애는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는 일에 전렴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은 ‘두 날개 가진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미약한 소그룹 날개를 회복하고, 대그룹 날개를 다시 새롭게 하여 예배가 축제가 될 때, 우리 예봄교회가 두 날개를 펴고 독수리처럼 비상하게 될 것이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