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1:1-7 ㅣ 김남수 목사]
셀 교회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며 조류입니다. 또한 이것은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성령의 바람이요, 물결이라고 생각됩니다.
전 세계적인 추세를 볼 때 온 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교회는 셀 교회입니다.
세계적으로 셀 교회로 유명한 교회에는 미국의 새들백교회나 윌로우크릭교회, 남미의 ICM교회, 아프리카의 CWMI교회가 있는데 이 중 CWMI교회 같은 경우는 아프리카의 가장 강력한 교회로 초등학생들까지 귀신을 쫓아내며 70만 명의 성도가 모입니다. 그리고 CWMI교회는 미국과 유럽의 성경학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셀 교회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세계적인 추세요, 성령의 바람인 것입니다.
중국은 공산주의가 등장한 이후 기독교가 점점 위축되어갔고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시작하면서 모든 교회가 폐쇄되었고 모든 선교사도 중국을 떠났습니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중국 기독교를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모택동의 실각 후 다시 개방된 중국에는 문화혁명 이전보다 더 많은 5,000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교전문가들은 이 결과의 중요한 원인을 ‘작은 무리운동’, 즉 ‘소그룹운동’, ‘예수가정교회’에서 찾았습니다. 이 운동이 자연스럽게 지하교회, 가정교회를 탄생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운동의 최초 시작은 중국이 아닌 신약시대의 사도행전 교회, 초대교회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평신도 지도자에게 쓴 글 인데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하노니’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러한 표현이 이곳에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고전 16장 19절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라고 했으며 골4장 15절에도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이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한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가정에서 모이는 일종의 가정교회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와 중국 지하 교회가 어둡고 암울한 사람들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우리들의 셀 교회가 상처받고 암울한 사람들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망이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지금부터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셀 교회는 ‘확장된 가족 교회’입니다.
확장된 가족이라는 용어는 현대인들에게 무너져버린 가족제도에 대한 유일한 ‘치료적 대안’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기능상으로 딤전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집’이며 교회의 지체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초대교회는 실제로 집에서 셀 교회로 몇 가정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교제하며, 서로 돌아보고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였습니다. 몬 1장 2절에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했으며 고전 16장 19절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초대교회는 몇 가정이 함께 셀 교회로 가정에 모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핵가족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핵가족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리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확장된 가족’입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 가족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갈 6장 10절 말씀의 ‘착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들에게 먼저 해야 한다’와 엡 2장 19절 말씀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다’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가 바로 확장된 가족공동체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오는 성도들이 서로를 가족으로 느낍니까? 바로 이 질문에 셀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몇 가족이 매주 모여 기도하고 삶을 나눈다고 과연 그들이 서로에게서 가족의 연대감을 느낄 수 있냐는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확신하건대 그들은 분명 친 가족 이상의 연대감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1세기 성도 빌레몬의 집에서 가진 모임이 바로 이런 ‘확장된 가족교회’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우선 빌레몬서 1장 1절~2절을 보면 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은 바로 빌레몬의 가족이었습니다. 자매 압비야는 빌레몬의 아내였고 아킵보는 그의 아들로 추정됩니다. 당시 이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에바브라라고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골로새교회가 이 빌레몬의 가정교회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골로새교회는 에바브라, 빌레몬 등의 몇 가족이 모여 빌레몬의 집에서 탄생시킨 교회였다고 추정됩니다.
이렇게 성경을 살펴볼 때 이상적인 셀 교회는 4~5개의 가정으로 이루어진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매 셀 교회, 형제 셀 교회뿐만 아닌 가족으로 이루어진 셀 모임도 때로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빨리 셀 그룹이 발전되어 그런 날이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럴 때 비로소 핵가족 시대의 소외를 넘어 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즉 셀 교회로 우리는 영적인 형님, 누나, 부모, 믿음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경험할 수 있으며 진정한 가족 교회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 셀 교회는 코이노니아 교회였습니다.
셀 교회는 일반 교회처럼 예배가 있습니다. 기도가 있습니다. 찬양이 있습니다. 성경공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셀 교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러면 셀 교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교제, 친교, 나눔으로 번역되지만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교제 그 이상입니다. 바로 삶의 나눔, 삶의 참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나눌 준비만 되어 있으면 누구나 셀 그룹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셀 교회의 모임의 하이라이트는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 자신의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이런 나눔의 교제가 우리에게 치유와 위로, 격려 더 나아가 변화를 체험하게 합니다.
스코틀랜드 국교회 내에서 가정교회 운동을 주도한 톰 알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메마른 교회 안에서 오아시스처럼 물을 내뿜는 살아있는 셀들, 앞으로는 이런 공동체만이 슬픔과 문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진지한 관심과 삶의 처방을 쏟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힘이 바로 이 교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날마다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교제하는 데서 얻었습니다.
행2장 42절~47절은 초대교회의 현저한 특성인 ‘코이노니아’가 실천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2절은 가르침에 근거한 교제(말씀+기도)를 말하고 있으며 44절은 다함께 있어 주고 45절에서는 자원함으로 필요를 공급해주는 것을 볼 수 있으며 46절에서는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고(밥상 공동체) 47절에서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전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몬 1장 5~7절에서 빌레몬 집에서 모이던 교회의 교제의 세 가지 두드러진 특성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교제였고, 이 교제의 결과로 그들은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인들은 교제에서 얻은 기쁨과 위로로 세상을 정복했던 것입니다.
셀 교회의 교제, 코이노니아의 출발점은 무엇보다도 셀 모임에서 진솔한 삶의 나눔이 활성화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제, 코이노니아의 진정한 뜻은 단순한 교제를 넘어선 진솔한 삶의 나눔이며 서로의 삶에 대한 참여인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한 나눔의 교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치유와 위로와 격려가 얻게 되고 더 나아가 영적 성숙과 기쁨과 새 힘을 얻는 체험을 하게 되며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일어나고 있는 교회는 모이기를 폐하지 말아야 하며, 모일 때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셀 교회는 만인 제사장 교회입니다.
종교개혁이 남긴 가장 큰 기여는 뭐니 뭐니 해도 만인 제사장직의 발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벧전 2장 9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은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제나 목사 같은 영적지도자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동시에 종교개혁이 남긴 하나의 숙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가 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만인 제사장직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데 첫째는 모든 성도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과 둘째는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성도는 직접적인 소명을 받아 사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 구성원의 모습에서도 그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부른 호칭을 보십시오. 당시 교회의 구성원의 사역을 보여준 일면입니다. 빌레몬에 대하여는 ‘동역자’로 (몬1:1) 아킵보에 대하여는 ‘군사’로 칭했습니다. (몬1:2) 그리고 아킵보에 명령한 말씀을 보면 ‘주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골4장17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셀 교회의 셀그룹안에서 은사에 따라 모든 지체들에게 봉사직을 맡겨 직분 수행을 하는 것은 만인 제사장 교회를 이루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넷째 셀 교회는 전도 지향적 교회입니다.
셀은 생명의 기본 단위이자 최소단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 즉 세포의 존재이유는 성장이 아닌 것입니다. 한 세포가 계속 성장만 하면 암이 되고 오히려 생명을 죽입니다. 세포는 분열을 통해 자신을 재생산하므로 몸을 자라게 합니다. 셀 교회도 일정한 숫자가 되면 반드시 나누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눔의 이유가 전도를 통한 나눔일 때 교회는 가장 건강한 방법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해 갈 수 있습니다.
셀 교회의 존재이유는 세포의 증식처럼, 곧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를 부르신 이유도 그들을 통해 또 다른 제자를 부르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를 삼으라’, ‘내가 너희를 택한 이유가 너희로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빌레몬이 속해 있던 골로새 교회는 열매 맺기를 통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골1장6절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집에서 모이는 교회가 성전에서 모이는 교회보다 전도에 더 유리한 점들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성전보다 가정이기 때문에 불신자 접촉이 용이합니다. 둘째로 편안한 분위기가 주는 열린 접근성입니다. 셋째로 여럿이 한 사람에게 공통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넷째로 삶을 보고 듣고 배움으로 양육이 용이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셀 모임(구역모임)에는 전 세계적으로 쓰이는 빈 방석, 혹은 빈 의자와 VIP명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이 셀 모임의 존재이유가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셀 교회는 철저히 ‘전도 지향적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과 쉽게 접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만남의 환경에서 차 한 잔을 나누고 작은 도움을 베풀 수 있다는 점이 그야말로 전도에 적합한 상황을 연출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랬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여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2장 46-49절)
마이클 그린이라는 성서학자는 자신의 명저 ‘초대교회의 복음전도’에서 ‘가정의 완전한 비형식성, 즉 긴장을 풀고 쉬는 분위기, 이와 함께 병행되는 손님접대야 말로 초대교회가 복음전파에 성공하는데 가장 완벽한 상황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계속해서 ‘데살로니가의 야손의 집, 고린도회당 건너편 디도 유스도의 집, 가이사랴의 빌립의 집, 빌립보의 루디아의 집, 간수장의 집이야 말로 1세기의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전도의 중심센터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셀 모임이 성도들과 가정을 치유하고 세상을 복음화 시키는 일에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