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수 목사]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보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 같이 급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변할지 모르는 세상,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노래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봅시다. 노래에는 트로트, 재즈, 랩, 발라드, 록,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가 있습니다. 오늘날 노래들은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정말 노래가 맞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기질 탓인지 나이 탓인지 모르지만 아무리해도 좋아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노래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통틀어 살펴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 떠난 노래가 없습니다. ‘잃어버린 사랑’, ‘못 잊을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는 사랑’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전부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두 사랑이 주제입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사람은 확실히 사랑으로 삽니다. 죽을 사람도 사랑으로 인해서 살아납니다. 사랑 없이 되는 일은 다 죽음으로 치닫습니다.
오직 사랑이 있어서 살고, 사랑이 있어서 의미가 있고, 사랑이 있어서 소생하는 힘을 얻고, 사랑이 있어서 병도 치유되는 것입니다. 참 사랑, 위대한 사랑에 감격하면 고난이나 질병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생깁니다.
사랑이 병들어서 문제입니다. 또 거짓된 사랑이 문제입니다. 거짓된 사랑에 속습니다. 거짓된 사랑이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무지가 문제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랑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사랑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단절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사랑하고 있고 사랑받고 있는데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 되고, 사랑을 모르면 괴롭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의 근원적인 속성을 설명하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본문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무디는 전도대회에서 붉은 글씨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크게 써서 강단 위에 걸어 놓았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사랑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사랑을 나타내 주셨는데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죽게 하심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타내 주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증거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들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믿으라!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을 믿으라. 이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 안에서 행복해져라!
이 사랑을 받고 더 나아가 받은 이 사랑을 베풀고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계속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사랑을 확인하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들을 보면 어떻게든 사랑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스킨십을 통해서 확인합니다.
손을 잡고 비비고 안기고 무릎에 앉고자 합니다. 잠깐이라고 아이의 옆에서 떠나든지 무릎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밀쳐보십시오. 엥! 울고 사흘 지나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아주 힘들어 합니다. 순간순간 자신만만하게 내 주변 사람들이 다 나를 사랑한다고 느낄 때 행복해합니다.
이것은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지 않고는 못 살고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 삽니다. 사랑을 확인하고 알고 깨닫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좀 어려운 고난을 치른다 하더라고 사랑만 확실하면 살 수 있습니다. 넉넉히 살 수 있습니다.
질병도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무너질 때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이걸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은 능력으로 힘으로 작용합니다.
진실한 참 사랑은 사람을 구원하고, 병을 고치고, 원수를 사랑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당신의 나약함, 두려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서입니다. 사랑을 못 받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받고 있는 사랑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고백하고 그 사랑에 충만할 때 그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질병도 없습니다. 그곳에는 참 평화가 있고 자신과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의심이 생길 때 로마서 5장 8절 말씀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내가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해주시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내가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바로 그 때 벌써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해서 사랑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선하게 살고 봉사한다고 보상차원에서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참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모 자식 간 사랑도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내가 잘해서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까? 오히려 실수도 많고 부족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나를 많이 사랑한다는, 우리 아버지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한다는 깨달음과 믿음, 그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나는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비유’를 아시지요?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왜 집에 안 들어 왔을까요? 돈 벌어 가지고 출세해서 가야지, 내가 이 모양으로 갈 수 없다. 즉 위선, 체면을 생각하는 바람에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게 살아보려고 애썼겠지만 점점 수령에 빠져서 마지막에 굶어 죽게 되어서야 돌아옵니다.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를 영접하고 ‘소를 잡아라, 옷을 입혀라, 반지를 끼워라’하고 환영잔치를 벌입니다. 둘째 아들은 너무 부끄러워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기에 저는 아들 자격이 없습니다. 머슴의 하나로 여겨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기뻐합니다. 오히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기뻐하고 환영합니다.그때 탕자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작 돌아올 걸’ 내가 집을 나갔으니 아버지도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고 내가 아버지를 잊었을 때 아버지도 나를 버리고 호적에서 지워버린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집을 나가 방황하고 있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하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탕자는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이러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에 벌써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죄인입니까? 더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내가 병들었습니까? 더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지요.
내가 실패했습니까? 남보다 나는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은 믿음입니다. 사랑은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한 이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진실한 자세는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 영원한 세계, 천국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에는 낙심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대한 보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절에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 하였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마땅하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런고로 내가 남을 사랑하고 또 자신도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의 엄청난 사랑 안에 있는 나, 사랑 받는 나, 나는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우리를 사랑 하셨으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는 예봄 교회 식구가 되시길 바랍니다.